이렇게 읽으면 2행과 4행의 둘째 음보가 비기 때문에 음보율에 어긋난다. 하지만 2글자에서 박자를 맞추려고 -표시를 단 것처럼, 이 둘째 음보만큼의 길이를 '침묵'으로 박자를 맞춘다면 어떻게 될까? 둘째 음보 ----에 들어갈 내용은 '피네'를 수식하는 부사어가 들어갈 것이다.
산에 꽃이 피고,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는데, '어떻게' 피는지를 마치 화자 말하려다 만 듯이 공란으로 비워둔 것이다. 산에 피는 꽃은, 외롭게 핀다 할까? 고독하게 핀다 할까? 괴롭게 핀다 할까? 쓸쓸히 핀다 할까? 어느 것도 딱 맞지 않으므로 "꽃이... (꿀꺽) ..피네." 로 오히려 담담하게 전달되는 속에, 생략된 그 말이 이 시의 주제인 것이다. 그것은 혼자 감당해야지 독자에게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는 점이 화자의 고독의 일부가 된다.
(2) 2연을 낭창하게 읽으면 다음과 같다.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저만치 / 혼자서 / 피어 있네
그런데 시인이 2연의 첫 3음보를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으로 행 분리한 것은, '山에' 꽃이 저만치 피어 있고, 또 그 옆 '山에' 꽃이 저만치 피어 있다는 뜻이다. 1행의 산과 2행의 산은 서로 다른 산봉우리를 표현한 것이고, 이 산에도 꽃은 혼자 피어 있고 저 산에도 꽃은 혼자 피어 있으므로 꽃만 혼자 핀 게 아니라 사실, 산도 혼자 솟아 있는 것이다.
(3) 산에는, 갈, 봄, 여름, 사노라네, 우는, ~네, 이것들은 유음, 비음, 마찰음, 으로 부드러운 자음에 속한다.
'꽃, 피, 치, 혼' 등은 경음, 격음으로 안 부드러운 자음에 속한다. 이 시에는 'ㄴ,ㄹ,ㅁ,ㅅ' 등의 부드러움 자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ㄲ'와 'ㅍ'라는 거친 자음이 섞여 있다. 시의 주요 소재인 '꽃'은 이러한 부드러운 자음 사이에 섞여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자음인 'ㄲ'를 담고 있다. 이질적인 자음 또한 '꽃'의 고독을 표현한다. 특히 꽃을 좋아하는 새가 함께 산에 있는데, 새의 'ㅅ'는 'ㄴ,ㄹ,ㅁ'보다는 세지만 'ㄲ,ㅊ,ㅍ' 보다는 부드러워 '새'가 '꽃'과 그 꽃을 외롭게 만드는 환경과의 매개 또는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새'도 꽃에게 궁극적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ㅅ'는 결국 위의 분류에서 부드러운 자음 쪽으로 소속되기 때문이다.
(4) 오늘 수업한 교사는 4연에서 이 시가 끝나지 않고 다시 1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을 언급했다. 갈, 봄, 여름이 지나 4연에서 겨울과 함께 꽃이 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영원한 안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시 1연으로 돌아간다. 겨울 이후의 봄이 희망의 상징이라면 이러한 대자연의 순환은 행복한 일일 것이며, 힘든 겨울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산유화가 '근원적인 고독'인 이유는, '꽃이 피'는 그 자체가 고독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왜 하필 태어나서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는가? 이럴 거면 피지나 말지. 그렇다면 고독의 해소는 꽃의 죽음뿐이다. 4연에서 꽃이 지면, 꽃의 소멸과 함께, 화자, 꽃, 새의 고독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자연은 순환한다. 꽃이 짐으로써 해소된 고독은,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핌으로써 반복된다. 4연 이후가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 다시 1연으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이 고독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이 된다. 또한 그러한 순환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수미상관' 즉, 1연에서도 고독하고 4연에서도 고독을 암시하는 것으로 드러낸다. 산유화의 '꽃'은 영원한 고독에 갇혀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
시의 음보율, 행의 분리, 시의 자음들, 수미상관의 배치와 같은 산유화의 '형식'이 근원적 고독이라는 산유화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눈이 심미안(審美眼)이고, 심미안은 심미적 체험을 통해 기를 수 있는데, 교사가 형식과 내용을 잘 설명하여 학생들이 '아, 그렇구나!'하는 것을 나는 '심미적 체험' 이라고 생각한다. 즉, 심미적 체험을 잘 하려면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에 대한 '아름다운 해설'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3 심미적 체험 성취기준에서 다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