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관리자
  • 작성일 : 2018-06-07 03:03:03
    이대규 교수님의 시분석 -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문학 작품의 저자가 작품을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독자에게 감상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다. 문학 작품은, 문학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의 평가를 바라거나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탐구 대상이 되게 할 목적으로 창작되지는 않는다. 문학 작품이 제대로 감상되려면, 감상되 기 전에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하지 못하는문학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서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거나 작품을 연구하는 것도 불가 능하다. 따라서 작품의 해석은, 일반 독자의 감상이나 문학의 평가나 문학의 연구에 선행되 어야 할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문학 연구가, 문학 연구의 선행 필수 조건인 해석을 거치지 않고, 문학 작품에 관한 추상적 일반화를 시도하여 왔다. 문학 연구의 기본적인 목적은, 일반 독자가 자 신의 능력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의 의미와 효과를 밝혀 줌으로써, 작품의 이해와 감상 을 돕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한국 문학의 연구는, 작품의 이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무의미어를 나열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문학 교육을 타락시켜 온 가장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문학 연구가 없었다면, 오히려 학생이나 일반 독자는, 개인적 직관에 의하여 문학 작품을 더 쉽고 자연스 럽고 즐겁게 감상할 것이다.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올바른 문학 작품 해석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지 않은 문학 작품에 관한 설명이 얼마나 작품의 의미를 왜곡하 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 글의 직접적인 목적은, 올바른 해석을 거치지 않고 이 작품 을 저항시라고 말하여 온 기존의 설명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아울러 필자는, 이 글이 무의미어를 나열하는 기존의 시 작품 해석과 무의미어를 한 마디도 사용하 지 않는 해석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작품의 문맥으로부터 멀리 이탈하는 기존의 시 작품 해석과 작품의 문맥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해석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리라고 생각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3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4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말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5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6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저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7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말아.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8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9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魂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습다, 답을 하려무나.
    
    10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집혔나 보다.
    
    11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
    이 시의 공간은 논과 밭이 있는 넓은 들이고, 말하는 이가 그곳을 거닐며 바라보는 현실 공 간이다. 말하는 이가 공간 속에서 움직이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말하는 시간이 일치하므로, 이 작품의 시간은현재이다.
    1.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1연 앞에는 다음 (1)∼(2)와 같은 말이 생략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래의 (3)은 1연의 의문 문장을 긍정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1) (1.1) 전에는 나의 땅, 나의 들에 (1.2) 봄이 왔었다.
    (2) (2.1)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 (2.2) 봄이 오지 않을 것이다.
    (3) (3.1)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 (3.2) 봄이 온다.
    (1.1)은 정상적 삶의 상황이고, (1.2)는 정상적 자연 현상이다. (2.1)는 비정상적 삶의 상황이 다. 말하는 이는 비정상적으로 바뀐 삶의 상황에 충격을 받아서, (2.2)와 같이 자연 현상도 변할 것이라고 - 봄이 올 때가 되어도 봄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었다. 그런데 실제 로는 (3.2)와 같이 자연 현상에 변화가 없다. 말하는 이가 예상한 자연 현상 (2.2)와 실제의 자연 현상 (3.2)는 서로 어긋난다. 1연의 물음은 예상과 실제 사이의 모순에 대한 의문을 나 타낸다. 말하는 이의 의식 속에서 예상하는 (2.2)와 실제의 결과 (3.2)는 서로 어긋나므로, 1 연의 물음은 아이러니이다. 이 아이러니는 땅을 잃은 절망감을 심각하게 전달한다.
    2.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2연 1행의 '햇살'은 1연에서 말한 '봄'의 햇살이다. 이 햇살은 따뜻한 봄햇살이지만, 남의 땅에서 받는 햇살이므로 낯선 햇살이다. 2연 2행의 '하늘과 들이 맞붙은 곳'은 지평선을 비 유적으로 표현하면서, '막힘, 벗어날 수 없음, 절망, 목표 없음'을 암시한다. 3행의 '가르마 같은 논길'은 말하는 이가 있는 곳으로부터 지평선까지 곧게 벋은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의 끝은 하늘과 들이 맞붙은 곳이어서, 끝까지 걸어도 현재의 상황 - 삶의 터전인 땅을 잃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3행의 '꿈 속을 가듯'은 전에는 나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남의 땅이 된 논길을 걷는 말하는 이가 절망 때문에 거의 제 정신을 잃은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 은 땅을 잃는 것이 정신을 잃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암시한다.
    3.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은 2연 2행의 '맞붙은 하늘과 들'이 변화된 심상이다. '입술을 다문 '과 '맞붙은'은 모두 '닫힘, 움직이지 않음, 어쩔 수 없음'을 암시하며, 현재의 절망적 상황 의 개선 가능성이 없음을 암시한다. 3연에서도 말하는 이는 2연의 '꿈 속을 가는 듯한' 몽롱 한 절망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3연은 이러한 2연의 절망이 더 깊어져서 외침으로 나타 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연에서도 말하는 이는 2연의 논길을 걷는 움직임을 계속하는 것 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하는 이는 자신이 남의 땅이 된 들로 나와서 들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의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말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4연에서 말하는 이는 봄바람이 몸을 스치는 것을 의식하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종달새 소리 에 얼굴을 들어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다. 4연에서는 공간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여 기서 독자는 봄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하늘을 날며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를 들으며, 하늘 의 구름을 바라보는 말하는 이의 모습과 말하는 이의 의식에 떠오르는 '울타리 뒤의 아가씨 '를 뚜렷하게 상상할 수 있다. 4연에서 말하는 이는 들이 자신의 땅이었던 때의 정신 상태 를 회복하고 활기를 되찾는다. 종달새 소리가 울타리 뒤의 아가씨처럼 반갑다는 것은 남의 땅이 되어서 낯설게 느껴지던 들길과 옛날의 자신과의 낯익은 관계를 다시 회복한 것을 암 시한다. 2행의 '한 자욱도 섰지 말라'는 바람의 계시는, 절망하여 걸음을 멈추지 말고 힘차 게 앞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새롭게 깨닫는 것을 암시한다.
    5.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6.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저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4연에서 하늘을 향하던 말하는 이의 시선은 5연에서 보리밭으로 이동한다. 5연에서 말하는 이는 지난 밤 내린 비를 맞아 싱싱해진 보리잎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6연 1행은 4연에서 활기를 되찾은 말하는 이가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6연에서 말하는 이는 논밭에 물을 댈 도랑물을 보며 흐르는 물소리를 즐겁게 듣는다. 시인은 여기서 아래와 같이 재치있는 유추를 사용한다. (1)을 (1.1)로 비유하고, (2)를 (2.1)로 비유하여, (1)과 (2)의 관계를 (1.1)과 (2.1)로 나타낸다.
    (1) 마른 논 (2) 소리내며 흐르는 도랑
    (1.1) 젖먹이 (2.1) (어머니)
    7.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말아.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6연에서 도랑을 보던 말하는 이는 7연에서 시선을 돌려 나비와 제비를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려 길가의 맨드라미와 민들레를 바라본다. 그리고 전에 이 들에서 김 매던 '아주까리 기 름 바른 이'를 회상한다.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누구인지를 짐작할 단서가 작품에 없으 나, 말하는 이가 들의 모든 구석을 다 보고 싶은 이유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김 매 던 곳이라고 하니까, 이 사람은 말하는 이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김 매던 때는, 이 들이 남의 땅이 아니고 제 땅이었을 때이다. 그러므로 7연 의 마지막 행은 지난 날의 그리움을 함축한다.
    8.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4연∼7연에서 말하는 이는 들을 바라보며, 땅을 잃기 전에 땅과 맺었던 심리적 관계를 회복 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7연 3행의 회상에 자극을 받아, 8연에서 말하는 이는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김 매던 행위를 실천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말하는 이와 관계가 끊어진 잃은 땅 과 다시 관계를 맺고 싶은 강렬한 희망을 암시한다.
    9.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魂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습다, 답을 하려무나.
    
    10.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집혔나 보다.
    
    4∼8연에서 잃은 땅과의 관계를 심리적으로 회복하고 기쁨과 즐거움에 사로잡혔던 말하는 이는 9∼10연에 이르러, 다시 1∼3연의 절망 상태로 되돌아 간다. 9연 3행의 "무엇을 찾느 냐, 어디로 가느냐 ?" 라는 물음은 4∼8연에서 말하는 이가 거닐며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고 느끼며 즐기던 모든 것이 땅을 잃은 자신에게 부질없는 것이라는 의식을 나타낸다.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강가를 달리는 아이'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디로 왜 가는지 모르며 위험한 곳을 방황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이 비유는 땅을 잃은 말하는 이의 불안, 허무, 절망을 암시한다. 9연 3행의 물음은 3연 3행의 물음처럼 말하는 이 가 간절하게 답을 찾고 싶지만,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이다.
    10연 1행의 '풋내'는 빼앗긴 들에서 맡는 싱싱한 풀냄새이다. 이것은 2연 1행에서 말하는 이 가 '온몸에 받는 봄햇살'과 같이 그가 걷는 들이 자신의 땅이었을 때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자연의 축복이었다. 10연 2 행의 '푸른 웃음'은 2연 1행의 햇살, 4연의 바람과 종달새 와 구름, 5연의 잘 자란 보리, 6연의 흐르는 도랑물, 7연의 나비와 제비와 맨드라미와 들마 꽃을 보는 즐거움을 뜻하고, '푸른 설움'은 들이 빼앗긴 땅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의 슬 픔을 뜻한다. 10연 3행의 '다리를 절며'는 말하는 이의 상실감과 절망을 불완전한 신체적 동 작과 고통으로 바꾸어 나타낸 것이다. 9연의 '혼'과 10연의 '봄 신령'은 말하는 이의 '무의 식(잠재 의식)'을 암시한다. 말하는 이의 무의식은 잃은 땅을 자기의 땅으로 의식한다. 그러 나 말하는 이의 의식은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땅이 남의 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말 하는 이가 들길을 걷는 것은 무의식에 따른 행위이다. 말하는 이는 자신이 들길을 걷는 행 위의 이유를 의식의 차원에서 찾으려고 한다. 의식 수준에서는 들길을 걷는 행위가 무의미 하다.
    의식 차원 : 들길을 걷는 것이 슬프고 허전하다.
    무의식 차원 : 들길을 걷는 것이 기쁘고 즐겁다.
    11연은, 1연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작품을 끝낸다.
    1. 물음 :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1. 답 :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그리하여 11연은, 1연에 함축된 의미를 드러내며 강화한다. 11연은, 땅을 잃은 말하는 이에 게 봄이 봄처럼 여겨지지 않음을 멋지게 나타낸다. 이런 멋짐을 발견하고 즐기는 것이 심미 적 경험이다.
    이 시에는 연인이나 어머니를 함축하는 여성 심상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이 여성 심상은 땅을 잃은 허전함을 연인을 잃은 젊은이나 어머니를 잃은 아이의 허전함처럼 느끼게 하고,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를 그리워하듯이 그리워하게 하는 분위기를 내는데 이바지한다.
    2연 : 가르마
    4연 : 울타리 너머 아가씨
    5연 : 삼단 같은 머리
    6연 : 젖먹이 달래는 노래
    7연 :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
    8연 : 살진 젖가슴
    흔히 이 작품은 저항시라고 불린다. '저항하다'는, 어원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밀어 서 물러가게 하다'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저항하다'는, 외부의 부당한 영향이나 간섭을 거 부하는 것을 뜻한다. 군사적으로는 세력이 약한 군대가 적군의 공격에 맞서는 것을 뜻한다. 정치적으로는 약한 정치 세력이나 피지배 세력이 강한 세력이나 부당한 지배 세력에 맞서는 것을 뜻한다.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는 지배를 받는 민족이 외국의 지배 세력을 물리치고 정치적 독립을 되찾으려는 운동을 가리킨다. 이 시가 저항시라면, 작품 속의 말하 는 이는 땅을 빼앗은 무리를 물리치고, 잃은 땅을 되찾자고 외쳐야 한다. 그러나 이 시에는 이런 외침이 없다. 땅을 빼앗긴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절망할 뿐이다.
    이 시를 저항시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작품을 쓴 시인의 저항적 활동을 작품과 관련짓는 것 이다. 이상화는 1927년에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거나, 1937년에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형 이상정을 만난 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세력에 붙잡혀 여러 번 갇혔다. 이상화가 저항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에는 저항이 없다. 저항하기와 시 쓰기는 같은 활동이 아 니다. 시인은 저항하고 싶은 욕구를 시에 표현할 수도 있고,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상 화가 저항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저항시라고 말하 는 것은, 시인은 밥을 먹고 사니까 모든 시는 '밥 먹는 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시는 땅을 잃은 절망감을 감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저항시가 아니라, '감상적 인 절망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 저항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 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시 에는 좋은 저항시도 있고, 나쁜 저항시도 있을 수 있다. 거꾸로, 저항이 없어도 좋은 시가 있고, 저항이 없으면서 나쁜 시도 있을 수 있다. 저항시는 좋고 저항 없는 시는 나쁘다는 것 은, 문학 작품의 올바른 평가 기준이 아니다.
    문학의 가치는, 어느 한 작품을 읽을 때 그 작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경험에 참가 하게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 경험의 질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이 시의 문학적 가치는, 이 작품이 다른 시를 읽을 때에는 경험하지 못하는 경험 - 이 작품의 상상적 상황에 있는 상상적 인물인 말하는 이가 빼앗긴 소중한 땅을 밟는 것이 그 땅을 잃은 그에게 어떤 느낌 을 주는지를, 독자가 자신의 느낌처럼 경험하게 하며, 이 시에 사용된 언어로 이루어지는 작 품의 짜임이 바로 그 경험을 전달하는 데 가장 알맞게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상적인 문학 감상자는, 첫째, 작품이 제공하는 경험에 참가하며, 둘째, 이 경험과 작품의 언어와 구조가 기가 막히게 얽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아무리 문학 해석력이 뛰어나도, 수준 높은 문학 교육을 받지 못한 독자는, 첫째 수준의 정서적 감 상은 할 수 있어도, 둘째 수준의 심미적 감상을 할 수는 없다. 모든 문학 연구의 출발점은, 일반 독자가 정서적 감상과 심미적 감상을 하도록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출발점 에 기초를 두지 않은 문학의 온갖 연구는, 쓸모없는 활동으로 전락할 것이다.



[처음]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끝]

작성자   제목   내용  
본 사이트에는 게시판이 5개 있습니다. 원하는 자료가 안 보이면 전체 게시판에서 검색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