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감천중3 이서현
교과서에 유치환의 시 ‘깃발’이 나온다. 깃발은 바다를 향해 날아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깃발이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부터 깃발은 깃발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깃발도 바다를 향해 날아가고 싶어 하지만 깃대에 묶여서 날아가지도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매듭을 풀어서 날아간다 해도 깃발은 바다의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깃발은 저 푸른 해원을 향해 날아가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깃대에 매달려서 안도한 채로 애수와 비애와 슬픈 마음을 펄럭인다. 이런 상황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지 않는 깃발이 현실에 불평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지 않는 사람도 현실에 불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첫째,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요인으로, 어떤 사람은 신체적인 요인으로,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요인으로. 이렇게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목표를 향해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 현실에 불평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둘째, 우리나라의 교육이 도전을 하기 어려운 구조로 가르치고 있다. OECD 청년 창업률을 보면 우리나라의 순위는 하위권에 있다. 왜 그럴까? 초, 중, 고, 학창시절 모두 어떤 현상의 근본 원인 탐구보다는 외워서 답을 찾아내는 교육에만 집중했다. 정답이 정해진 게임에서 모범 답안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경쟁구도에서 도전을 바라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첫째, 정말 간절히 원하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경우만 생각한 것이다. 도전을 할 경우 성공만 하겠는가? 실패를 감수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인가? 아니다. 사람마다, 도전의 규모에 따라 실패를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도전을 쉽게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실패의 경우까지 생각한 아주 영리한 사람이다.
둘째,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거만 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못하는 것이 안 하는 것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로 목표에 도전하지 않는 것과 환경에 의해 목표에 도전하지 않는 것 둘 다 결론은 도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표를 향해 도전하지 않는 사람도 사회에 불평할 수 있다. 목표를 향해 도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회에 불평하지 말라 강요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이 사람이 왜 도전을 하지 않을까와 같은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쳐서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그러지 못한다면 차라리 괜한 참견 하지 않고 자기 개발에 힘쓰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