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의 한국 문학교육론자는, 문학 작품의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텍스트 해석을 비판하며, 수용 미학 교육을 내세운다. 신비평이라고 부르던 습관적 반응 문학 교육을, 수용 미학이나 독자 반응 문학 교육이라고 바꾸어 불러도, 습관적 반응 문학 교육은 달라지지 않는다. 습관적 반응 문학 교육에 새로운 구호를 바꾸어 붙이는 것은, 문학 교육을 개선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문학의 해석 수준이 향상되고, 이것이 문학 교육에 반영되기 전에는, 이 나라의 문학 교육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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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게 감상을 묻고 싶으면 우선 해석하는 도구를 주어야 합니다. 해석의 도구는 결국 문학 이론입니다. 문학 이론 중에서도 신비평의 이론들이 내재적 관점에서는 유일하게 훈련 가능한 방법입니다. 자습서나 지도서에 정해진 정답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해석하고 '다양한' 해석을 인정하는 것은 '수용 미학'이든 '독자 반응 비평'이든 '신비평'이든 '형식주의'이든 같습니다. 우리가 극복해야할 단 하나의 적은 "습관적 반응 문학 교육"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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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과학의 관계가 이러하기 때문에 문학 교육에서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지식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상상은 공상이나 망상으로 빠지기 쉬우므로 경계해야 한다.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은 三更인제’를 읽은 독자가 ‘달이 밝은 한밤중이구나.’라고 시간적으로만 이해하면 바슐라르(2000:323)의 말대로 묘사를 건너뛰어 버린 도식화 경향에 빠지게 된다.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달빛 어린 배꽃과 기울어진 은하수에 의해 환기된 밤의 질료에 대한 이미지를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문학적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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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제가 쓴 논문의 일부분입니다. 문학에서 추구하는 감수성과 상상력조차도 텍스트의 정확한 해석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공상'이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상력만을 기르는 것은 문학 교육의 목표일 필요가 없지요. 다른 예술 과목에서 해도 될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