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클럽 시간에 강사선생님의 지갑이 없어졌다. 가방을 강당 한 켠에 두고 수업을 했는데 수업 마치고 보니까 지갑을 누가 빼간 것이다. ‎난감한 표정으로 의논하러 왔는데, 나도 답이 없었다. 강당에서 수업 들은 학생 30여 명 중에 범인이 있을 테지만, 그리고 옛날처럼 지금 즉시 소지품 검사를 하면 찾을 수 있겠지만 21세기 인권의 시대에 그럴 수도 없다. 고민 끝에 112에 신고했다. 일단 학생-용의자에게 경고를 날리려는 의도였다. 다행히 경찰이 3분이나 오셔서 CCTV 도 보고 화장실도 뒤져보며 돌아다니니 교내에 뭔가 불안한 분위기는 잘 형성되었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해당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강사 선생님이 먼저 “내가 너희들 보이게 가방이랑 지갑을 둔 게 잘못이고, 괜히 욕심나게 만든 것도 미안하다. 그 안에 학교 카드도 있고 내 카드도 있고 면허증도 ‎있는데 카드는 새로 만들면 되는데 면허증이 없으면 지금 운동부 아이들이랑 차 목고 훈련하러 가야되는데 갈 수가 없다. 내일 출근할 때도 차를 몰 수도 없다. 돈은 빼가더라도 카드나 면허증은 꼭 돌려주길 바란다.” 이렇게 말하고 내가 이어서 “경찰이 왔다갔는데 학교 안에서 좋게 끝내라고 하더라. 경찰이 수사 시작하면 선도위원회 징계로 안 끝나고 범죄자가 된다더라. 오늘 가방에서 지문도 찍었고 CCTV도 다 보고 가서, 잡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라. 우리도 그렇게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혹시 호기심에 가져갔다면 오늘 마치고 운동장 구석 아무 곳에나 지갑을 슬쩍 버려두고 가라. 내일 아침에 내가 운동장 구석구석을 뒤져볼 테니까 어디 갖다 뒀는지도 말할 필요 없다.” 하고 내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퇴근 시간 직전에 청소용역하시는 분이 지갑을 하나 주워왔다. 신관 계단 참에 떨어져있었다는 것이다. 아까 잃어버린 그 지갑이었다. 누구였을까 궁금하기보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강사선생님을 위해서도 그렇고, 그 훔쳐간 아이도 완전히 막장으로 치달은 게 아님을 알게 되어서도 그렇다. 면허증 이야기를 통한 약간의 죄책감 유발과 경찰을 동원한 약간의 위협이 먹힌 것인데, 남아 있는 문제는, 이게 처음에 먹히지 매번 통하지는 않는다는 점과 그 범인 아이가 다음에 또 누군가의 물건을 노릴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정지용이 윤동주의 동생에게 윤동주에 대해서 묻고 답하기를,
“연전(延專)을 마치고 동지사(同志社)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戀愛)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읍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읍니다.” “인색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져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심술(心術)은?” “순(順)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읍데다.”
라고 하였는데, ‘심술’, ‘주책’이 긍/부정의 의미 없이 중립적으로 쓰였다. 의미나 용법의 변화는 참으로 신기하다. 예전 같으면 “심술이 어떻냐?”라고 물으면 “좋아요, 나빠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진짜 ‘심술’의 의미였는데, 심술이 좋을 때는 잘 안 쓰고 심술이 나쁠 때 “심술이 나빠요.”라고 오래 쓰다보니, ‘심술’ 그 자체가 마치 나쁜 뜻을 가진 것처럼 굳어진 것이다. 요즘 인성이라는 단어가 ‘심술’의 뒤를 잇고 있는 것 같다. ‘인성’ 그 자체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아직은 “인성이 어떻냐?”라고 물으면 “좋아요, 나빠요” 이렇게 대답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성이 나빠요”라는 말과 더 자주 붙어 다닌다. 그래서 “인성 갑”, “인성 보소”이렇게 말할 때의 ‘인성’은, “(나쁜)인성”의 준 말이다. 정지용이 저렇게 쓴 건 광복 직후인데, 아직 60년밖에 안 된 일이다. 그런데도 지금 사전에 ‘심술’을 찾아보면 부정적인 의미만 실려 있다. 언젠가 50년 내에 국어 사전에서 ‘인성’을 찾으면 ‘나쁜 성격을 뜻함.’ 이렇게 나오는 걸 볼 수 있으려나? 내가 90살쯤 됐을 때 이 글이 기억나면 국어사전을 봐야겠다.

http://www.saemga.com/gnu4/bbs/board.php?bo_table=cgy0626cgy0626&wr_id=182

교장선생님께 옛날 필기자료들을 정리하다 보니 별 우스운 게 다 나오는 군.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였던 것 같다. —- 교장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늘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선생님을 늘 존경해 왔습니다. 제가 이렇게 펜을 든 것은 선생님께 부탁이 하나 있어서입니다. 먼저 저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학생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방학 동안 2학년들은 특별실 3곳에서 6시까지 자율학습을 합니다. 인원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거기에 들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보충 수업 시작 몇 일 후부터 몇몇 학생들이 “특별실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며 도서관으로 내려 오더니 지금은 많은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1.15.) 도서고나 난로에 기름이 떨어져 추워서 공부를 할 수 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무실에 가서 수위아저씨께 기름을 좀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계시던 화학 선생님께서 “특별실 놔두고 뭐하러 도서관에서 해? 추우면 특별실 올라 가. 너거 몇 명 때문에 도서관 형광등 켜고 기름 난로 때고 뭐아. 학교가 너네 안방이야.” 그러시길래, “선생님, 특별실은 자리가 다 찼고, 여기 있던 애들은 추워서 갔습니다. 또 마침 오늘은 비가 와서 특별실 창문을 계속 닫고 있으니 머리가 아파서 그러니 좀 넣어 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집에 가라. 그라고 기름은 못 넣어 주니까 내일은 옷 따시게 입고 온나.”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들 휴게실 자판기 플러그는 뽑지도 않고 24시간 가동하고 선생님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체육관의 수은등도 켜 놓으면서 비싸지도 않은 등유값하고 형광등 전기세가 아깝습니까? 학교가 학생을 내몰다니 말이나 됩니까? 몇 푼의 재정을 아끼기 위해,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보려는 학생들의 의욕을 위축시키다니요. 그러니 제 부탁은 다름이 아니옵고 도서관에서도 공부할 수 있게 난로에 기름을 좀 넣어 주십사하는 것 뿐입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이렇게 써서 교장실 문틈으로 밀어 넣자고 친구랑 계획짜고 글까지 다 썼는데 결국 안 했다. 우리 돈으로 기름 사 넣고 말았지.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는 패배적인 삶을 살았다. 독도 망언 반대 서명 운동도 실패. 국어, 문학, 문법, 작문, 기술, 음악 시험 문제 건도 그렇고.

다 9년 전 이야기다. August 01, 2005 10:38 PM


지금은 19년전 이야기.

교육사회 교수님 “그동안 학생의 글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간단하게 전합니다. 우선 학생의 글은 자신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었고, 가끔 그 생각은 다수 학생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어 눈에 띄었습니다. 과장되어 있지 않고, 현실적인 시선에 공감될 때가 많았었죠. 가끔 심드렁해 하고, 무심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고. 약간은 긴장하며 나는 학생의 글을 읽었답니다.”

나는 6년 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몰랐었다. August 01, 2005 10:20 PM


2015년 12월 12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2005년에는 내가 정말 저 말의 의미를 이해한 걸까 의심된다.

지난일기중 반성하라.회개하라.

2교시 한문 시간. 한문 시간은 무조건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는 시간이다. 안 따라 읽으면 종아리를 맞는다. 평판도 좋지 않고 수업 태도도 좋지 않은 학생이 있는데 이번에도 따라 읽지 않고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나와” “선생님 경고로..” “나와” “뭐하는 시간이냐?” “한문 시간이요” “아니 뭐하는 시간이냐니까” “따라 읽는 시간이요.” “의자에 올라가. 몇 대 맞을래?” “맘대로 때리세요” 찰싹,찰싹,찰싹 당연히 그런 기분으로 따라 읽을 리가 없다. “너 또 나와” “…” “왜 안 따라 읽는데?” “짜증나서요” “왜 짜증나는데?” “때리니까요” “왜 때렸는데?” “안 따라 읽으니까요” “근데 왜 짜증나?” “그냥 경고 한 번 주고 다음에 잘 하면 되잖아요” “넌 지난 시간에도 걸리고 늘 태도가 안 좋으니까 그렇지” “그건 지난 시간이고” “그럼 나는 앞에서 열심히 읽는데 어떤 애가 자리에 앉아서 안 따라 읽고 딴 짓하면 내가 짜증이 날까 안 날까? 내 생각을 해봐” “…” “생각을 해 보라니까. 짜증이 날까 안 날까?” “짜증 나겠네요” “자, 지시봉 받아. 니가 수업해라. 애들이 따라 읽게.” 이렇게라도 해야 한 번이라도 읽어 보지.

쉬는 시간에 3학년 애들이 교무실에 놀러 왔다가 나에게 말했다. “샘 오늘 아침에 화 났지요? 싸가지 없는 애때메”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닌데 뭐, 작년 너희들을 생각해 봐라” “우리가 뭘요”

4시 30분에 퇴근하려다가 환경미화하는 우리반에 갔다. 지난 금요일부터 계속 남아 있는 애들이었는데 오늘은 피자를 먹고 싶다고 했다. 피자헛은 비싸서 못 사주고 원플러스 피자를 사 주었는데 다른 반 애들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그냥 시켰다. 역시나 다른 반 애들이 와 있는 상태에서 피자가 왔는데 다같이 나눠 먹을 양은 아니었다. 다른 반 애들을 다 내 보냈다. 우리 반 애들 중에 일은 안 하고 영어 숙제 때문에 남아 있다가 먹을 거 얻어 먹으려고 안 가고 있는 애가 있었는데 그 애까지 덩달아 다른 반 애들을 쫓아 내는 걸 거들었다. “한 조각만 주세요~” 하던 애들이 “피자가 그렇게 맛있냐” 하면서 돌아섰다. 옆 반 애들은 컵라면 사먹으려고 나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 그렇게 쫓겨난 애들 중 하나가 자기 친구를 데려 와서는 그 애에게 왜 사람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쫓아 내냐고 따졌다. 못 본 척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 나가서 다른 반 아이 두 명과 우리반 아이를 불러 들였다. “왜 남의 반 아이를 괴롭히냐” “저 애가 이 애를 기분 나쁘게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우리끼리 먹을 거니까 나가라고 했어요” “그럼 얘가 얘한테 사과하면 되겠네” “사과했어요” “사과를 성의없이 해서 얘가 화가 난 거예요” “야, 니가 딴 반에 놀러 갔는데 자기들끼리 먹으려고 너보고 나가라고 하면 좋겠냐? 다시 사과해” “미안하다”

애초에 기분 나빠서 따지러 온 아이는 계속 울고 있고 그의 친구는 달래고 있고 사과한 아이는 교실을 뛰쳐 나갔다. 자주 놀러 가는 9반에 갔더니 역시 친구들 품에 안겨서 울고 있었다. 또 교실로 데리고 왔다. “야 넌 왜 울고 있냐?” “미안해서요” “미안하면 사과하고 그 애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니냐? 그 애가 괜찮다고 했어? 네가 사과를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렇게 뛰어 나가면 네가 사과한게 분해서 그런 줄 알지 미안해서 그런다고 누가 생각하겠냐?”

애초에 교실에서 음식물을 못 먹게 되어 있는데 피자를 시켜준 내가 잘못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는 건 자기반 아이들이 남아서 다른 반 아이들 저녁 먹는 데 와서 얻어 먹게 방치해 둔 담임 선생님들이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 남겨 둘 거면 저녁을 확실히 해결해 주든지. 아이들이 자기돈으로 밥 사먹어가면서까지 환경미화를 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학급 운영 지원비도 나오는데. May 05, 2005 09:30 PM

 나는 별로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가끔씩 나에게 창의적이라고 한다. 내가 발휘하는 창의성은 대부분 다른 데서 보고 들은 것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창의력보다 응용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다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것을 창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둥, 피카소도 처음에는 사실주의 데셍부터 시작했다는 둥 하는 말에는 일정한 진실이 담겨 있다.  어제 한문 시간이었다. ‘얻을 득’ 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예지랑 동재가 신나게 웃는 게 보였다. 예지한테 물었다.  “왜 웃나?”  “웃을 수도 있죠.”  준하가 그 말을 듣고  “우와, 저 말버릇 좀 봐라.” 하며 비난하더니 나를 보며 덧붙였다.  “선생님, 요새 왜 이렇게 말이 딸려요? 저번에 백경민한테 말싸움 지고 나서 자신감을 잃으신 거 아니에요?”  나도 지지 않고 똑같이  “왜 웃는지 물어볼 수도 있지.” 했더니  “그냥 재밌어서 웃었어요.” 하는 들으나마나 한 대답이 돌아왔다.  본문은 책을 빌려 가서 읽지도 않고 돌려주면 다시 주면서 반드시 읽게 만드는 ‘동춘당 송선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제집 사서 앞쪽만 까맣게 풀고 뒤쪽은 안 풀어서 하얗게 남겨지는 경우를 예로 들며 연희에게 물었다.  “그럴 때 뒤쪽도 ‘반드시 풀게 만드는’ 동춘당 송선생 같은 사람이 있나?”  “엄마요.”  “엄마가 남은 부분 풀라고 강요하면 푸나?”  “예.”  나는 예지 말을 흉내 내어 말했다.  “왜 풀어? 엄마한테 ‘안 풀 수도 있죠.’ 이렇게 말하면 되지?”  다른 분단에서 누군가가, 다 들리게 말했다.  “와, 쌤 뒤끝 장난 아니다.”  나는 말에 민감하기 때문에 작품 속의 대사, 문장이나 남의 말을 잘 따라한다. 원작을 아는 사람이 들으면 재미있는 패러디로 받아들이고,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창의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니 일석이조이다. 물론 원작을 알고 들을 때가 훨씬 재미있다.  요산 김정한이 지은 ‘수라도’의 배경을 찾아 문학기행을 갔을 때, 미륵당의 모델이 된 용화사 법당에서 강사님이 ‘수라도’의 첫 머리를 읽어 준 적이 있다.  “와 그라노, 우리 부체새끼를……”  보살 할매들이 어린 분이를 놀릴 때 분이의 할머니 가야부인이 한 말이다.  그런데 강사님이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있을 때 함께 온 선생님 집의 아이가 법당 안을 뛰면서 장난을 쳤다. 다른 선생님 한 분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데 내가 말했다.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우리 부체새낀데…”  수라도의 첫 문장을 모르고 들으면 도대체 내가 무슨 뜬금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05년도에 수학여행가는 버스 안에서 구민정이랑 안경진이 나한테 “선생님이 말 하는 건 무슨 소설 대사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옛날 중국에 마씨 성을 가진 다섯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이라는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흰 눈썹 즉, 백미(白眉)는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춘향전’은 한국 고전 문학의 ‘백미’이다.”라고 쓰면 된다.  마량은 유비에게 등용되어 재주를 펼친다. 오나라가 형주를 점령하고 관우를 죽이자 유비가 오나라에 복수하려고 전쟁을 일으킨다. 마량도 유비를 따라 갔는데, 유비가 숲속에 길게 진을 치자 위험하다고 말렸다. 유비가 말을 듣지 않자, 제갈량의 의견을 받아오겠다 하고 촉으로 떠난다.  삼국지에서 마량은 이 이후로 나타나지 않는다. 유비가 이 전쟁에서 패할 때 같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고생을 많이 하면 머리가 하얗게 센다고 한다. 양나라 주흥사는 천자문을 짓느라 하룻밤에 머리가 하얗세 세었고 공자의 제자 안회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여 29세에 이미 머리가 세었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흰 머리칼은 중간쯤부터 하얀 경우도 있어서 그 즈음부터 고생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도 지난 2년간 논문을 쓰느라 머리카락 몇 가닥이 세었고, 신기하게도 입술 아래 수염도 한 가닥만 하얗게 변했다. 그것을 마량의 백미에 빗대며 뽑거나 깎지 않고 치열함의 훈장인 양 그냥 두었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쳐다보며 한 마디씩을 했다. 그러던 수염이 논문을 다 쓰고 몇 달이 지난 지금은 다시 검어지기 시작했다. 2년 만에 수염이 하얗게 센 것도 신기한데 고생 끝났다고 다시 검어지는 것은 더 신기한 일이다. 규진이 말처럼 회춘이라도 하나보다.  다만 한 가지, 머리를 깎으면 힘이 빠지는 삼손처럼 흰 수염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면 나도 이제 ‘백미’가 아닌 평범한 재주로 돌아갈까봐 그게 걱정이다. 안 그래도 요즘 벌여 놓은 일들이 진도가 잘 안 나가는데, 점점 사라지는 흰 색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나의 치열함 같아서 씁쓸하다.  참고로, 마씨 오형제 중 마량의 동생은 ‘마속’이라는 사람이다. 마씨 오형제는 모두 재주가 뛰어나다고 했듯이 마속도 재주가 뛰어났다. 그런데 유비는 마속이 재주보다 말이 앞선다며 중히 쓰지 않았고 제갈량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의 재주를 아껴 신임하고 대우하였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전쟁을 일으킬 때 마속도 따라갔다. ‘가정’이라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일에 마속이 자원하자 평지에서 길목을 막으라는 작전을 명령한다. 마속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위나라의 장합에게 큰 패배를 당하고 중요한 길목을 빼앗긴다.  제갈량은 명령을 위반한 마속을 군법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을 아꼈기에 눈물을 흩뿌렸다.  마속의 재주가 아까워 살려주자는 장완에게 제갈량은, 자신이 먼저 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법을 따르겠느냐고 말했다. 장완이 그러면 왜 우냐고 묻자 제갈량은, 유비의 말을 듣지 않고 중요한 길목에 마속을 보낸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운다고 하였다. 이를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 한다.

 3년 동안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과연 그럴까?”를 입에 달고 살았더니, 아이들도 의심하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다.  문법 범주를 가르치는데 ‘사동’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5반이었다.  “사동의 사는 한자로 ‘시킬 사’인데, 자기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을 시키는 거다.” 라고 알려준 다음, 칠판에 영어 문장을 썼다.  ‘I have him read.’  ‘I made him read.’  “영어 좀 하나? 이거 해석해 봐.”  “나는 그에게 책을 읽게 만들었다.”  “읽는 건 누구지?”  “그요.”  “읽으라고 시킨 건 누구지?”  “나요.”  “그럼 read 말고 have, make는 뭐지?”  “사역동사요.”  “사역동사를 두 글자로 줄여 봐.”  “사..동?”  아이들은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거 맞아요? 선생님이 지어낸 거죠? 억지 쓰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것보라는 듯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을 한 번 내려다 봐 준 다음, 피동으로 넘어갔다.  3반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설득하는 글쓰기’ 단원인데 ‘근거’에 대응하는 말을 찾으랬더니 아이들이 ‘의견’이냐, ‘주장’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아이들이 물었다.  “의견이랑 주장이랑 뭐가 달라요?”  “뭐가 다를 것 같나?”  “모르겠는데요.”  한 아이가 나섰다.  “그러는 선생님은 알아요?”  “어떻게 생각하나?”  “쌤도 모를 것 같아요.”  “니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어떻게 하면 알아낼 수 있을까?”  “박사한테 물어 봐요.”  얘가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지 잠시 웃겼지만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가 지난 2월에 박사가 되었다. 이제 내가 알 것 같나 모를 것 같나?”  그 아이가 외쳤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몇몇 아이들이 ‘진짠데?’, ‘페이스북에서 봤다.’ 이러면서 내 편을 들었다. 어쨌든 그 수업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가 되었다. 한 아이가  “사전을 찾아 봐요.” 하기에,  “그럼 이 시간 마치고 도서실 가서 사전에서 찾아본 다음 교무실로 와서 알려 줘.” 하였다.  교무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듣고 있던 과학과 선생님들이,  “쌤 수업 듣는 애들은 너무 어렵겠다.” 하였다.  담임 장학하는 날 장학사도 ‘너무 대학생만 가르쳐서 아이들한테 어렵게 가르치는 건 아닌지…’하는 말을 하였는데, 아이들한테 정말 어려운지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나는 진실만을 말한다.

 나는 라면, 떡볶이, 치킨, 햄버거, 튀김 등을 좋아한다. 몸에 해로운 것뿐이다.  좀 오래된 일인데, 어느날 롯데리아에서 라면 버거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 먹어본 블로그 글에 따르면, 양이 적고, 먹을수록 라면 면발들이 부스러져서 재빨리 먹어야 하며, 패티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너무 궁금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라면과 햄버거 두 개를 동시에 먹을 수있다는 생각에 꼭 먹어보고 싶었다.  나는 할 일이 많을 땐 하단 오거리 탐앤탐스에 자주 가는데, 그 바로 앞에 롯데리아가 있다. 밥 시간이 되면, 롯데리아에도 가고, 길 건너의 죠스 떡볶이에 가서 떡볶이랑 튀김을 먹기도 한다. 돈이 없을 땐 편의점 컵라면도 자주 먹는다. 하여튼, 라면 버거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탐앤탐스 가는 길에 일부러 가서 먹어 보았다. 양도 적절하고 소스도 비빔면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꼭 맞았다. 면발도 의외로 잘 뭉쳐져 있고 패티는 들은 대로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불량식품이라고 많이 못 먹게 했던 라면과 햄버거를 동시에 먹으니 기분까지 불량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부모님의 눈을 피해 나쁜 일을 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움과 쾌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맛이었다. 그 뒤로는 롯데리아 갈 일만 있으면 라면 버거를 먹었다.  지난 일요일에도 할 일이 많아서 탐앤탐스에 갔다. 탐앤탐스에 올라가기 전에 오랜만에 라면 버거가 먹고 싶어서 롯데리아에 갔다. 롯데리아에도 아웃백처럼 시즌 메뉴가 있나 보다. 매장 문에 무슨 ‘닭강정 버거’라는 이름의 신메뉴 포스터가 크게 붙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라면 버거 있어요?” 하니까 점원이,  ”이제 라면 버거 없어요.” 하였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이제 다시는 못 먹는다니.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나에게 점원이 말했다.  ”새로 나온 닭강정 버거 드셔 보시죠?”  나는 그냥 갈까 하다가 이왕 온 김에 맛이나 보고 가려고 “그거라도 주세요.” 하였다.  점원은 주방쪽으로 주문을 넣으러 돌아보다가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점원에게 말하였다.  ”와 드디어 하나 팔았다.”  나는 왠지 이용 당한 기분이 들었다. 라면 버거도 영영 못 먹게 되고, 맛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신제품의 실험용 고객이 된 듯해서 우울했지만, 강정 버거의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오늘 창작 영재 수업 간식으로 학부모님이 강정 버거를 보내 주어서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아기가 커서 라면, 떡볶이, 치킨, 햄버거, 튀김 등만 좋아하고 밥을 잘 안 먹으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그게 걱정된다.  아기의 입맛은 3살 이전에 먹은 음식에 길들여져서 나중에 낯선 음식을 잘 못 먹게 된다고 하기에, 3살 되기 전에 미원, 설탕, 다시다, 콜라, 과자 같은 걸 안 먹이면 어떨까 하고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말하길,  ”다 소용 없다. 우리도 다섯 살 때까지 유기농만 먹이고 설탕 없는 과자만 먹였는데, 어린이집 가서 사탕 한 번 먹더니 애가 사탕맛에 환장을 하더라.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우리 부모는 나에게 먹이지 않았냐는 듯이 미친듯이 사탕맛에 빠져 들더라.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나도 간디처럼 내가 먼저 끊고, 우리 아기에게 안 먹이든지 해야겠다. 어린이집에는 또 뭐라고 말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