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을 읽었다.

라고는 하지만 내가 읽은 책은 “빨강머리 앤”이 아니고 “그린게이블즈의 앤 제1권 만남”이다.

아직 9권이 남았다.

읽으면서 추억 + 새로운 감동이 멈추지를 않았는데, 가장 놀라운 점은 어릴 때 본 애니메이션과 “너무 똑같은” 전개였다.

하지만 나무위키에 따르면

참고로 타카하타 이사오 등 제작 스태프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어리고 천방지축인 소녀 앤의 심리 상태에 공감하기 힘들었고 때문에 자연히 작품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럴 바엔 그냥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며 이런 이유로 다른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에 비하면 책을 고스란히 옮겼다고 할 정도로 원작 재현도가 유독 높은 작품이라는 점도 한 특징이다.

라고 한다.

앤이 한 번 입을 열면 따옴표가 기본 한 페이지를 넘겨야 닫힌다. 명대사도 많지만 이번에는 이걸 골라본다.

나를 이처럼 슬프게 만들었으니 머릴러는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거예요. 하지만 용서해 주겠어요. 그때 내가 용서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물론, 어릴 때는 “이렇게 슬플 때 돼지고기 넣은 야채 스프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아요.” 부분을 좋아했지만. 용서가 갖는 이중적 의미를 아직 깨닫기 전이니까.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휴머니스트, 2015

 

현대의 어떤 예술은 작품 자체보다 해설이 더 감동을 줄 때가 있다. 시란 본디 그러한 예술에 속한 장르는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시를 잊고 사는 이 메마른 시대에 시보다 더 감동적인 시 해설서가 나왔다.

이 책은 한양대학교에서 개설된 시 강의를 책으로 옮긴 책이다. 부제가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이다. 별, 가난, 기다림, 아버지 등 12개의 소재/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공유하는 시, 소설, 노래, 영화,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어쩐지, 강의할 때의 제목은 ‘문화혼융의 시 읽기’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별에 대한 장에서는,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린다. -방정환, 「형제별」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히 멀듯이 -윤동주, 「별 헤는 밤」

 

이렇게 별과 관련한 고독의 이미지를 모아서 보여주는가 싶더니 영화 <라디오 스타>의 대사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를 통해 인기 스타의 고독을, 그리고 평생 고독 속에서 살다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을 통해 가서 닿을 수 없는 곳을 동경하는 근원적인 고독으로 주제 의식의 정점을 찍는가 싶더니 고흐에게 바치는 노래, 돈 매클레인의 팝송 <빈센트>를 인용해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죠. … 아마 그들도 지금은 듣고 있을 거예요.”라고, 독자를 위로하며 끝맺는다.

사람을 웃겼다 울렸다 하면서 감동을 주는 이 책은 그러나, 똑똑한 책이다. 김소월의 시를 어떻게 감상할지, 김수영의 시 「눈」을 어떻게 감상할지, 어지간한 자습서나 시 해설서보다 훨씬 쉽게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향점을 정확히 안다는 점에서도 똑똑한 책이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이 책을 덮고 시집을 펴라, 시를 잊은 그대여.”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은 당신이 할 일이다.

 

 

바야흐로 글쓰기 책의 전성시대이다. 글쓰기 책이란 무엇인가?

첫째, 시인, 소설가, 칼럼니스트 같은 글쓰는 사람이 쓰다 쓰다 쓸 게 없으면 쓰는 책이다. 시로, 소설, 칼럼으로 쓸 말이 없으니까 글을 쓰던 자기 경험을 팔아먹는 것. 둘째, 출판사에서 위대한 작가에게 좋은 글을 쓰는 비결을 알려 달라고 졸라서 만드는 책이 있다. 독자들은 위대한 작가의 창작 비결을 엿보면서 감탄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셋째, 애초에 글쓰기 교육이 목적인 책도 있다. 이런 책의 저자는 유명한 작가인 경우도 많지만 작가로서는 대성공하지 않아도 된다. 가르치는 능력과 실행하는 능력이 늘 비례하지 않는 것은 글쓰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니까.

『서민적 글쓰기』는 이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저자는 애초에 교수이지 글쓰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잘 쓰긴 하지만 위대한 작가도 아니다. 심지어 이 책에서 소개하는 글쓰기 요령들은 너무 다 알려진 내용이라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자세하고 재미있는 예시 덕분에 쏙쏙 이해가 되긴 하지만.

이 책의 결론은 뻔하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한다는 것. 천 년 전에 구양수가 이미 한 말이다. 글쓰기가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그저 그런 교훈으로 들린다. 하지만 저자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당신이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면서 실제 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신의 삶은 절실하게 바꿔야할 만큼 비참하지는 않다는 것. 이 뻔하지 않은 위로가 ‘역시 서민이야!’하며 독자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래도 진심으로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서민적 글쓰기』를 반복해서 읽지는 말고 저자인 서민처럼 ‘글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좋겠다.(856)

 

 

 

 

『서민적 글쓰기』, 서민, 생각정원, 2015

 

 

2015년 6월 26일. 김영하 번역판 위대한 개츠비

그가 말한 모든 것은, 그 과장된 감상성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아주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포착하기 어려운 리듬과 잃어버린 단어들의 편린을. 잠깐 동안 하나의 대사가 내 입을 통해 형태를 갖추려고 시도했고, 내 입은 놀란 숨소리 이상의 무언가를 내뱉기 위해 기를 쓰는 벙어리의 입처럼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거의 떠올릴 뻔했던 기억 속의 그것은 영원히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남았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새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5번가를 걸어올라가 군중 속에서 신비로운 여자 하나를 찾아내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여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나만의 공상을 즐겼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들의 집까지 뒤쫓아가고, 그러면 그녀들은 어두운 거리 모퉁이에서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찬란한 어스름 속에서 나는 간혹 저주받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들-해질 무렵, 거리를 서성이며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쓰라린 한 순간을 그대로 낭비하고 있는 젊고 가난한 점원들-에게서도 발견하였던 것이다.


순수하게 하루키적이라고 생각했던 감수성은 명백히 피츠제럴드적인 면도 있었네.

예전에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으면서 하루키적인 문체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아쉬움.

May 05, 2005

4월이 가고 5월이 왔지만 5월은 4월보다 더 가혹했다. 5월이 되자 나는 깊어 가는 봄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떨림은 대개 해질녘에 찾아들었다. 목련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 오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없이 부풀어오르고, 떨리고, 흔들리고, 아픔으로 차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오랜 시간이 걸려 그런 느낌은 지나갔고, 그 후에 둔탁한 아픔을 남겨 놓았다. – 하루키, 상실의 시대, p 388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북돋아 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 <아직도 가야할 길> (스캇펙 저/신승철, 이종만 공역), p113

출처: http://mindwatching.kr/entry/namiya-zakkaten-no-kiseki [마인드와칭]

 

상담가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사랑을 위와 같이 정의하였다.

이것은 자아를 확장시켜/내담자를 성장시켜 문제가 상대적으로 작아보이게 만드는 한상담의 원리와 꼭 같지 않은가.

문제 중심이 아닌, 문제 해결 중심. 문제 해결 중심도 아닌, 자아 성장 중심의 상담.

심플은 정답이 아니다

도널드 노먼, 이지현, 이춘희 옮김 | 교보문고 | 2012년

 

심플이 정답이 아니라면 무엇이 정답인가? 애플의 성공 이후로 ‘심플한 디자인’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국의 카이스트에서도 강의를 했던 인지과학자 도널드 노먼은 점점 더 단순함을 추구하는 현대의 상품 디자인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 집에 최신형 텔레비전이 있다. 검은 테두리와 화면밖에 안 보이는 깔끔한 디자인이다. 각종 버튼은 검은 테두리에 터치 센서로 숨겨져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다. 이 단순함은 훌륭한 디자인인가? 텔레비전에는 온갖 기능이 들어있지만 리모컨이 없으면 작동시킬 방법이 없다. 본체에는 버튼이 전원, 볼륨, 채널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겉으로 만져지지도 않아서 어두울 때 리모컨 없이 텔레비전을 켜려면 테두리를 한없이 더듬더듬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짜증을 내며 텔레비전 디자인팀을 저주했던 나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도 이미 저자의 생각에 적극 동의하고 있었다.

단순함이 아니라면 ‘복잡함’이 정답인가?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이야말로 단순함의 극치이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다. 다만 그 복잡함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을 뿐이다. 즉, 제품을 단순하게 디자인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복잡함을 통제하는 디자인이 바로 정답이다.

나는 “네 책상은 너무 복잡해. 그래 가지고 일이 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나는 좁아서 불편할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문제가 없다. 복잡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가 그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면 큰 혼란을 느낀다. 그렇다. 단순함의 반대는 복잡함이지만, 복잡함의 반대는 단순함이 아니라 혼란함이다. 그리고 혼란함의 반대는 복잡함이 아니라 이해이다. 삶이 복잡한가? 인간관계가 복잡한가? 그것은 복잡함이 아니라 혼란함이며, 삶과 인간관계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으면, 삶과 모든 관계를 끊을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본질을 알고 제품을 디자인해야 된다는 말이다. 도발적인 제목과 매력적인 초반부와는 달리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내용과 약간 뻔한 결말에 힘이 빠지긴 하지만, 도발적인 제목의 매력이 사라지기 전에 단숨에 읽히는 책이다. 심플하게 디자인된 반어적인 원서의 표지와 혼란스럽게 디자인된 번역서의 표지를 비교하는 것도 작은 재미가 있다.

 

 

조선상고사, 신채호, 김종성 번역, 역사의 아침, 2014

 

단재 신채호가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역사책 조선상고사이다. 감옥에 갇힌 신채호가 참고서적도 없이 지은 글이다. 웅녀와 단군할아버지밖에 몰랐던 고조선 시대부터, 통일신라 직전까지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고조선, 고구려의 본래 이름부터,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신채호만의 독자적인 해석 등,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와는 많이 다르다. 다르다기보다는 수두시대, 삼조선 등 아예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들이 더 많다. 우리는 가치평가가 배제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서술된 역사만 배워왔지, 신채호처럼 자신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서술한 역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국사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 역사’이다.

조선의 역사를 쓰기 전에 신채호가 자신의 역사 서술에 대한 관점을 밝히는 「총론」 부분은 역사를 제대로 서술하는 방법에 대해 명쾌한 말로 설명하고 있다. 신채호는 고려 이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유교 사상’에 맞지 않는 고대 역사들이 축소·왜곡되었다고 본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우리 고유의 사상에 따른 우리 겨레만의 삶이 있었지만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역사 서술로 인해 삼국사기에서 축소·왜곡되었고, 유교적 세계관에 지배된 조선 500년 동안에도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신채호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든 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가 외면·축소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고려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관되게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 역사를 부정해 왔던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딱딱하고 지루한 역사서가 아닌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사서이다. 원래 조선상고사는 한자가 많고 옛날 말투라서 읽기가 까다로운 책이었고, 그동안 나온 현대어판도 한자어만 한글로 바꿔놓은 수준이 많아서 여전히 어렵게 느껴졌다. ‘김종성’ 번역의 조선상고사는 약간의 생략과 의역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한 책이라 읽기가 쉽고 내용이 잘 이해된다. 정말 번역자에게 감사할 일이다.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 출판사 /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였던 오주석 씨가 특강한 것을 녹취하여 책으로 묶었다. 서양 미술에 익숙한 감상의 눈으로는 한국의 미술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저자의 지론을 실제 그림을 곁들이고 알기 쉬운 말로 풀어서 잘 설명하였다.

제1강부터 한국 미술 감상에 도움이 되는 주옥같은 설명들이 쏟아진다. 누구나 듣고 보면 무릎을 탁 치면서 탄성을 지를 만한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큰 그림은 멀리서 보고 작은 그림은 가까이서 봐야 된다고 이야기한다. 전시장에서 각기 크기가 다른 그림을 보는데, 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음 그림, 다음 그림으로 옮겨가는 관람객은 정말 무식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림 볼 줄도 모르면서 전시장을 다녔던 옛날 일이 떠오르면서 부끄러워진다.

또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쓰기하던 한국의 글쓰기 방식에 따라 그림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세로로 감상해야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마치 이것만 알아도 한국 미술의 비밀을 다 알 것 같은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듣고 보면 너무 옳은 이야기라서 그동안 몰랐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이다. 시선의 움직임이 가로쓰기 전통의 서양 그림과 다르기에 그림의 구도, 여백이 위치한 공간, 마지막 시선이 머무는 곳 등이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이동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의 그림을 전시하면서 전시장의 동선을 좌에서 우로 이동하게 짰다면 그 전시의 질은 볼 것도 없다. 오른쪽으로 지나가면서 그림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중학교 음악 시간 외에 ‘국악’ 시간을 따로 정해서 수업을 하는 모양이다. 이 책을 교재로 중학교에서 한국의 미 수업도 했으면 좋겠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1, 2

리처드 파인만 지음 /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천재 과학자의 자서전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자이지만 동료들에게는 금고털이로 알려져 있었고, 브라질의 축제에서 봉고라는 악기를 연주하였고, 미국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였다. 그가 자기 입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이렇게 살라는 인생의 지침이나 교훈이 되는 진리의 말씀은 없다. 그저 물리를 좋아하는 한 인간의 유쾌한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을 뿐이다. 독자들은 그 속에서 저마다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

교사로서 나에게 와 닿았던 것은,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어떤 권위에도 주눅 들지 말라는 것. 물리를 이야기할 때는 물리만 이야기하면 된다. 경력이나 학력이 주는 권위, 심지어 한 나라의 국왕이 가진 권위조차도 물리학을 이야기할 때는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둘째, 천재는 계속해서 노력하는 재능(후지타 카즈히로,『꼭두각시 서커스)이라는 것. 파인만이 천재라서 저절로 금고 터는 법에 능숙해진 것이 아니다. 금고를 여는 원리를 알아내려고 여러 번의 실험을 거치고 남들 몰래 연습한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몰랐을 뿐이다. 셋째, 브라질 대학생들의 받아 적기식 물리 공부에 대한 파인만의 비판은 마치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는 것. 원리에는 관심 없고 교수가 말해주는 것을 달달 외우기만 하려는 수동적인 학생의 태도는 문제풀이식 수업에 익숙한 한국의 고등학생들을 보는 것 같다. 넷째, 여자를 꼬시고 싶으면 절대 아무 것도 사 주지 말라는 것. 파인만의 시대에도 ‘나쁜 남자’가 여자에게 인기가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