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16.

딱히 중요한 자료를 페북에 올리는 건 아니지만, 스쳐 가는 아이디어를 페북에 적어놓고 나면, 나중에 찾을 수가 없어서 빨리 페북을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고 이런 저런 준비를 했는데 워드프레스가 참 좋으면서도 2%부족한 점이 문제여서 그것을 다른 도구로 보완해 보려고 이리저리 궁리만 하다가 바빠져서 완전히 손 놓은 게 벌써 2년이 지나버렸다. 그 사이에도 “간편한 포스팅”의 유혹에 못 이겨 facebook 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또 2년치 정리해야할 자료가 쌓여버렸다. 이제 e-mail 작성 -> 워드프레스 게시 -> 페북공유 이 3단계가 “모두” 자동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스마트폰에서 메일 작성하는 방법이 아주 간편하고, 테스트 결과 사진까지 잘 어울리게 게시된다. 이제 페북만큼 “간편한 포스팅”이 준비되었고, 워드프레스를 보완할 도구로 결국 moniwiki 를 결정했다. 완벽한 도구를 기다리기보다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다. 또 옮겨 타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 페북을 끊을 준비가 됐다.

2017.6.27.

모니위키 스킨이 가독성이 떨어져서 고민이고, 타이틀인덱스에 위키씨드들이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해서 정작 콘텐츠가 아래로 밀리는 문제, 결정적으로 저장할 때마다 amp 로 리다이렉팅되는 문제. 이건 아무래도 & 가 문제인 거 같은데 소스 뜯어봐도 딱히 보이지가 않아서 고민은 많으나 딱히 대안이 없는 채였다. 애초에 모니위키와 dokuwiki 중에 결정할 생각이었는데 dokuwiki 가 php 5.3 이상을 요구하는데 반해, 내 계정은 php 5.2 라서 포기한 상태였으나 다시 머리를 써서 php 5.2가 현역이던 시절에 개발된 dokuwiki 구버전을 찾아 깔았더니 이제 잘 돌아간다. 다만 이게 2014년판이라 너무 구식인 감이 있고 여러 가지 보안 이슈가 있을 것  같지만 기본 기능만 쓰면 되니까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페북에 자동 게시..는 당분간 하지 않는 걸로 결정. 워드프레스 초기 화면 로딩이 너무 느린 점도 보완 가능하다면 보완해서, 의외의 수확인 mangboard 체제로 싹 개편하면 어떨까 생각 중.

BlackBerry 10 스마트폰에서 보냄

“빨강머리 앤”을 읽었다.

라고는 하지만 내가 읽은 책은 “빨강머리 앤”이 아니고 “그린게이블즈의 앤 제1권 만남”이다.

아직 9권이 남았다.

읽으면서 추억 + 새로운 감동이 멈추지를 않았는데, 가장 놀라운 점은 어릴 때 본 애니메이션과 “너무 똑같은” 전개였다.

하지만 나무위키에 따르면

참고로 타카하타 이사오 등 제작 스태프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어리고 천방지축인 소녀 앤의 심리 상태에 공감하기 힘들었고 때문에 자연히 작품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럴 바엔 그냥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며 이런 이유로 다른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에 비하면 책을 고스란히 옮겼다고 할 정도로 원작 재현도가 유독 높은 작품이라는 점도 한 특징이다.

라고 한다.

앤이 한 번 입을 열면 따옴표가 기본 한 페이지를 넘겨야 닫힌다. 명대사도 많지만 이번에는 이걸 골라본다.

나를 이처럼 슬프게 만들었으니 머릴러는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거예요. 하지만 용서해 주겠어요. 그때 내가 용서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물론, 어릴 때는 “이렇게 슬플 때 돼지고기 넣은 야채 스프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아요.” 부분을 좋아했지만. 용서가 갖는 이중적 의미를 아직 깨닫기 전이니까.

부산대 국어교육과 옛말의 이해

해동중, 영도중: 과정중심 수행평가 컨설팅

백양중: 배움중심 수업 연수1, 2강

부산국어교사모임 젊은 국어교사를 위한 연수: 문법교육

전남교육청, 충북교육청, 세종교육청, 울산교육청 1정연수: 문법교육

이승만 정부 당시의 대한민국 헌법 前文은 이렇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2015년 11월 현재 대한민국 헌법 前文은 이렇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이승만 정부 당시의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능동을 썼고, 지금 현대 헌법에서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이라고 피동을 썼다.

단기 4281년 7월의 제헌 국회 사람들은 정말이지 당당하게도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건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능동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제9차 헌법 개정 때에는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피동을 쓸 수밖에 없었음에 동의하면서도,

저 밑줄 자리에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써도 아무 문제가 없고, 능동으로 바꾸었을 때 생략된 주어가 저절로 복원되므로 건립의 주체가 드러나는 좋은 점이 있다.

  1. 스노우캣이 운전을 한다.

2. 스노우캣이 교회를 간다.

최근 5년 이내에 느낀 가장 큰 배신감. 그것도 두 방 연속. 심지어 1.과 2. 중 어느 쪽이 더 큰 배신감인지 잴 수도 없을 만큼.

아아, 이제 아무래도 좋아.

나도 차 사야지. ㅎㅎㅎ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의 「총론」에서 우리 역사를 부정해온 역사를 고발한다.

신채호에 따르면, 통일신라 이전에는 우리 고유의 사상에 따른 우리 겨레만의 삶이 있었다.

그러나 ‘유교 사상’이 우리나라의 지배 관념이 되면서 ‘유교’의 틀에 맞지 않는 우리 고대 역사들이 축소·왜곡되었다.

첫째, 고려 시대에 김부식의 (유교 사상에 따른) 사대주의적 역사 서술로 인해 <삼국사기>에서 우리 겨레의 자주적이고 온전한 삶이 축소·왜곡되었다.

둘째, <발해고> 등의 노력이 있었긴 했지만 유교적 세계관에 지배된 조선 500년 동안에도 우리의 온전한 고대사가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신채호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든 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가 (일제강점기 당시에) 외면·축소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고려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관되게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 역사를 부정해 왔던 것이다.

2017년이면, 일제강점기는 끝난지 오래다.

그런데 이제는 고대사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임시 정부’를 세워 독립을 위해 노력하던 역사를 부정하는 무리가 창궐하고 있다.

임시 정부가 만들어진 1919년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진 1948년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하여 이전의 대한민국 역사를 축소·왜곡하고 있다.

김구 선생은 남한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만 추구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 공신’은 아니라는 미친 소리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부정해온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도란 놈들: http://news.nate.com/view/20151101n08412?mid=n0403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휴머니스트, 2015

 

현대의 어떤 예술은 작품 자체보다 해설이 더 감동을 줄 때가 있다. 시란 본디 그러한 예술에 속한 장르는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시를 잊고 사는 이 메마른 시대에 시보다 더 감동적인 시 해설서가 나왔다.

이 책은 한양대학교에서 개설된 시 강의를 책으로 옮긴 책이다. 부제가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이다. 별, 가난, 기다림, 아버지 등 12개의 소재/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공유하는 시, 소설, 노래, 영화,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어쩐지, 강의할 때의 제목은 ‘문화혼융의 시 읽기’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별에 대한 장에서는,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린다. -방정환, 「형제별」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히 멀듯이 -윤동주, 「별 헤는 밤」

 

이렇게 별과 관련한 고독의 이미지를 모아서 보여주는가 싶더니 영화 <라디오 스타>의 대사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를 통해 인기 스타의 고독을, 그리고 평생 고독 속에서 살다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을 통해 가서 닿을 수 없는 곳을 동경하는 근원적인 고독으로 주제 의식의 정점을 찍는가 싶더니 고흐에게 바치는 노래, 돈 매클레인의 팝송 <빈센트>를 인용해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죠. … 아마 그들도 지금은 듣고 있을 거예요.”라고, 독자를 위로하며 끝맺는다.

사람을 웃겼다 울렸다 하면서 감동을 주는 이 책은 그러나, 똑똑한 책이다. 김소월의 시를 어떻게 감상할지, 김수영의 시 「눈」을 어떻게 감상할지, 어지간한 자습서나 시 해설서보다 훨씬 쉽게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향점을 정확히 안다는 점에서도 똑똑한 책이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이 책을 덮고 시집을 펴라, 시를 잊은 그대여.”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은 당신이 할 일이다.

 

 

바야흐로 글쓰기 책의 전성시대이다. 글쓰기 책이란 무엇인가?

첫째, 시인, 소설가, 칼럼니스트 같은 글쓰는 사람이 쓰다 쓰다 쓸 게 없으면 쓰는 책이다. 시로, 소설, 칼럼으로 쓸 말이 없으니까 글을 쓰던 자기 경험을 팔아먹는 것. 둘째, 출판사에서 위대한 작가에게 좋은 글을 쓰는 비결을 알려 달라고 졸라서 만드는 책이 있다. 독자들은 위대한 작가의 창작 비결을 엿보면서 감탄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셋째, 애초에 글쓰기 교육이 목적인 책도 있다. 이런 책의 저자는 유명한 작가인 경우도 많지만 작가로서는 대성공하지 않아도 된다. 가르치는 능력과 실행하는 능력이 늘 비례하지 않는 것은 글쓰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니까.

『서민적 글쓰기』는 이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저자는 애초에 교수이지 글쓰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잘 쓰긴 하지만 위대한 작가도 아니다. 심지어 이 책에서 소개하는 글쓰기 요령들은 너무 다 알려진 내용이라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자세하고 재미있는 예시 덕분에 쏙쏙 이해가 되긴 하지만.

이 책의 결론은 뻔하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한다는 것. 천 년 전에 구양수가 이미 한 말이다. 글쓰기가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그저 그런 교훈으로 들린다. 하지만 저자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당신이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면서 실제 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신의 삶은 절실하게 바꿔야할 만큼 비참하지는 않다는 것. 이 뻔하지 않은 위로가 ‘역시 서민이야!’하며 독자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래도 진심으로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서민적 글쓰기』를 반복해서 읽지는 말고 저자인 서민처럼 ‘글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좋겠다.(856)

 

 

 

 

『서민적 글쓰기』, 서민, 생각정원, 2015

 

 

며칠 전 근황.

오늘 새벽에는 아이콘 더 많아짐. 찍어둘 여력도 없었음 ㅋㅋ

2015년 6월 26일. 김영하 번역판 위대한 개츠비

그가 말한 모든 것은, 그 과장된 감상성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아주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포착하기 어려운 리듬과 잃어버린 단어들의 편린을. 잠깐 동안 하나의 대사가 내 입을 통해 형태를 갖추려고 시도했고, 내 입은 놀란 숨소리 이상의 무언가를 내뱉기 위해 기를 쓰는 벙어리의 입처럼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거의 떠올릴 뻔했던 기억 속의 그것은 영원히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남았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새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5번가를 걸어올라가 군중 속에서 신비로운 여자 하나를 찾아내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여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나만의 공상을 즐겼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들의 집까지 뒤쫓아가고, 그러면 그녀들은 어두운 거리 모퉁이에서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찬란한 어스름 속에서 나는 간혹 저주받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들-해질 무렵, 거리를 서성이며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쓰라린 한 순간을 그대로 낭비하고 있는 젊고 가난한 점원들-에게서도 발견하였던 것이다.


순수하게 하루키적이라고 생각했던 감수성은 명백히 피츠제럴드적인 면도 있었네.

예전에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으면서 하루키적인 문체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아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