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짓기]지워지지 않는 질문
  • 관리자
  • 작성일 : 2019-02-27 18:46:22
    지워지지 않는 질문

    작년 2학기에 선행출제 점검을 한다고 교육청에 고사원안과 이원목적분류표를 보내라는 공문이 왔다. 선행출제 점검이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문제 중에 안 배운 내용이나 다음 학년에 나올 내용이 있는지 교육청에서 검사하는 거이다. 안 배운 내용이나 다음 학년에 나오는 내용을 시험에 내면 아이들이 학원에서 미리 배우고 오기(선행학습) 때문에 공교육이 망가진다는 논리이다.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교육청이 일선 학교의 시험 문제를 점검하는 것이다. 나는 총괄부장이고 실무는 평가 담당선생님이 한다.
    평가 담당 선생님이 해당 과목 선생님들에게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빠진 게 없나 검토하고 교육청에 보내는 마지막날이 되었다. 업무에 꼼꼼하고 학급도 똑부러지게 관리하는 평가 담당 김 선생님이 말했다.
    "부장님 이거 어떻게 해요?"
    "왜요?"
    "수학 선생님 말씀 들어 보세요."
    수학 선생님 말씀 들어 보니까, 이원목적분류표에 정답 하나가 잘못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장 선생님까지 결재받은 거라 부장, 교감, 교장 서명이 모두 되어 있는데, 잘못 표기된 정답을 고치면 새로 결재를 받아야 한다. 교육청에 보낼 때는 바로 고친 이원목적분류표를 보내고 싶은데, 교감까지는 결재를 새로 받았으나 교장 선생님이 안 계셔서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교장 쌤 사인 없이 그냥 보낼까요?"
    "오늘까지 보내야 하죠?"
    "네."
    "보내는 건 이원목적분류표 사본이죠?"
    "네."
    "이원목적분류표 원본에는 교장 쌤 사인을 어쨌든 나중에라도 받을 거지요?"
    "네."
    "정답 틀린 이 이원목적분류표는 폐기할 거지요?"
    "네."
    나는 새 이원목적분류표를 한 장 복사했다. 그리고 헌 이원목적분류표의 교장 서명을 가위로 오려서 새 이원목적분류표 복사본의 서명란에 풀로 붙였다. 그리고 그걸 다시 복사했다. 이제 교장 서명까지 들어간 새 이원목적분류표 사본이 완성되었다.
    "이걸 교육청에 보내세요. 원본은 내일 교장 쌤 오시면 꼭 결재 받아 두시고요."
    "이렇게 해도 돼요?"
    "괜찮아요. 어차피 점검위원들이 그냥 확인만 하려는 거지 무슨 증빙을 하려는 게 아니거든요. 걱정 마세요."
    이런 식의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부장님 이거 온라인 수업 신청 기한이 지나갔어요. 어떡해요?"
    "괜찮아요. 교육청에 전화하면 또 받아줄 거예요."
    "부장님 이거 좀 안 맞는데요."
    "괜찮아요. 그거 억지로 맞추느라 시간 쓰지 말고 대충 해 두세요.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닌데요."
    그 꼼꼼하고 똑부러지는 선생님은 드디어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은 도대체 학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뭡니까?"
    교육청에 보낼 문서의 결재 순서도 안 중요하다, 교육청의 신청 기간도 안 중요하다, 이것도 안 중요하다, 저것도 안 중요하다니 좀 답답했을까? 아니면 순수한 궁금증이었을까? 
    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마땅한 답이 없어서 그냥
    "음,, 애들이 올바른 교육 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거나 교사가 부당하게 피해 입는 일을 막는 거?"
    이렇게 자신 없이 말했다. 그리고 2005년에 우리 반 반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부산여자중학교에서 첫 담임할 때의 일이다. 5월에 체육대회를 했다. 핸드볼은 1위, 응원상은 1위를 했다. 줄다기리와 이어달리기는 예선 탈락을 했다. 승부욕 강한 우리 반 반장 이은지와 그의 친구들이 아쉽다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지면 어때서."
    그러나 그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떠들고 수업을 안 들어도
    "그럴 수도 있지."
    교실에 청소가 안 돼 있어도
    "더러우면 어때서."
    오죽하면 우리 반 구민정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반은 너무 더럽고 산만해서 짜증나요. 나는 돈 줘도 선생님은 절대 안 할 거예요."
    하여튼 반장 은지는 내가 "지면 어때서."라고 말하자 소리쳤다.
    "선생님은 도대체 꼭 이겨보겠다는 게 뭐예요? 뭔가 꼭 해내야겠다는 게 있을 거 아녜요?"
    나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던가? 아니 나에게 꼭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표라는 게 있긴 했던가? 아마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웃어넘겼던 것 같다.
    13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인생의 목표가 생겼나? 아직도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 외에 미래를 전망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고 익숙하지 않다. 1년의 계획을 미리 세우는 교육계획서 만들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매월 말에 돌아오는 다음 달 '월중행사' 작성도 힘들다. 1년의 학사일정을 짜는 교무부장을 보면 존경스럽고 감탄스럽다.
    그 꼼꼼하고 똑부러지는 선생님은 이제 다른 학교로 떠났지만 그의 질문은 흔적처럼 남아서 어느 한가한 오후가 되면 문득 문득 떠오른다.
    "부장님은 학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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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 신해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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