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 관리자
  • 작성일 : 2018-03-28 03:22:33

    2015 년 스승의날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 권혁웅,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권혁웅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편지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권혁웅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 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 할까 지병(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 용서받을 수 없었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창비(2005년 12월 20일, 초판 4쇄)---

    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먼저 나간 형의 1982년
     
    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畵中之餠이라 할까 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 나올 것 같았다

    -‘문학사상’ 9월호 시의 일부 

    그랬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광주항쟁도 사춘기를 보내던 시인에게는 그저 ‘먼 곳의 이상한 소문’이었을 뿐. 술 취한 아버지의 분노를 앞에 두고도 프로야구 원년스타 박철순의 신기(神技)를 떠올리고…. 그 분노도 형이 구해온 삼천만의 주간지 ‘선데이 서울’ 속 비키니 미녀를 보고 싶은 소년의 열망을 잠재우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의 구비구비 서린 서사(敍事)는 당대를 같이 살았어도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청년의 눈과 중년의 눈이 다르고, 어린 학생과 원로 교수의 해석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당대를 같이 겪었다는 동질감은 얼마나 은밀하고 가슴 뜨거운 일인가. 세월이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선데이 서울’의 브로마이드 미녀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녀를 보면서 ‘가슴 속에서 천불이 일었을 소년과 청년’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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