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짓기]일어날 일
  • 관리자
  • 작성일 : 2018-04-24 17:57:49
      교무실 내 자리에 비상용 우산이 있다. 우산 없이 학교에 왔는데 갑자기 비가 오면 비상용 우산을 쓰고 집에 간다. 다음날이면 비가 오지 않더라도 다시 들고 와 교무실에 놔 둔다. 맑은 날 우산을 들고 만원버스를 타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비오는 날 우산이 없어 비맞고 집에 가는 것보다는 덜 불유쾌하므로 꼭 교무실에 되돌려 놔야 한다. 물론,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은 집에 있는 우산을 쓰고 다니니까 비상용 우산은 교무실에서 하루종일 쉰다. 굳이 따지자면 비상용 우산은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허름한 우산이고 집에 있는 우산은 제법 튼튼하며 모양도 내가 아끼는 호피무늬이다. 게다가 핑크.
      오늘 비가 와서 집에 있는 우산을 쓰고 학교에 왔는데, 오후엔 비가 그쳤다. 부산대에 공부하러 가려고 교무실에서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인간은, 오늘 버스와 지하철과 순환버스를 여러 번 탈 건데, 비는 안 오고, 밤늦게까지 이 핑크 호피 우산을 들고 먼 길을 다니다간 반드시 잃어버리겠지?'
       40년간 보아 온 나다. 뭘 새삼스럽게 묻나.
      '만약 이 우산을 잃어버리면 무지 아깝겠지? 그런데 밤에 또 비가 올 수 있으니 학교에 놔 두고 갈 수도 없겠네.'
      그리고 나는 아침에 가져 온 우산 대신 쉬고 있던 비상용 우산을 집어들었다.
      이야기의 결말은 뻔하다. 난 그래도 부산대까진 들고 오고 밤에 집에 갈 때쯤 잃어버릴 줄 알았다. 하지만 부산대 올라가는 순환버스까지도 못 버텼다. 부산대 지하철역에서 내릴 때 이미 우산 따윈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내가 우산을 잃어버릴 것을 알았지만 그걸 막지 못하고 결국 잃어버렸다.
      난 이제 안다. 미래를 미리 알 순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마녀의 저주를 막지 못해 15세에 되던 날 손가락을 바늘에 찔린 오로라 공주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거라는 예언을 피하지 못한 오이디푸스를, 나는 더이상 어리석다고 탓하지 않는다.
      우리 장모님이 어느날 꿈을 꾸었다.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사무실 열쇠가 가방 안에 들어 있어서 사무실에 못 들어가는 꿈이었다. 꿈일 뿐이었지만, 가방이 비싼 가방이었기 때문에 잃어버리면 낭패이므로 오늘은 다른 가방을 가져가기로 했다. 허름한 가방에 지갑, 휴대폰, 수첩 등 필요한 걸 옮겨 담은 다음 출근을 했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 문을 여는데, 열쇠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사무실에 못 들어가고 다시 집에 왔다.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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