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미와 읍참마속
옛날 중국에 마씨 성을 가진 다섯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이라는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흰 눈썹 즉, 백미(白眉)는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춘향전’은 한국 고전 문학의 ‘백미’이다.”라고 쓰면 된다.
마량은 유비에게 등용되어 재주를 펼친다. 오나라가 형주를 점령하고 관우를 죽이자 유비가 오나라에 복수하려고 전쟁을 일으킨다. 마량도 유비를 따라 갔는데, 유비가 숲속에 길게 진을 치자 위험하다고 말렸다. 유비가 말을 듣지 않자, 제갈량의 의견을 받아오겠다 하고 촉으로 떠난다.
삼국지에서 마량은 이 이후로 나타나지 않는다. 유비가 이 전쟁에서 패할 때 같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고생을 많이 하면 머리가 하얗게 센다고 한다. 양나라 주흥사는 천자문을 짓느라 하룻밤에 머리가 하얗세 세었고 공자의 제자 안회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여 29세에 이미 머리가 세었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흰 머리칼은 중간쯤부터 하얀 경우도 있어서 그 즈음부터 고생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도 지난 2년간 논문을 쓰느라 머리카락 몇 가닥이 세었고, 신기하게도 입술 아래 수염도 한 가닥만 하얗게 변했다. 그것을 마량의 백미에 빗대며 뽑거나 깎지 않고 치열함의 훈장인 양 그냥 두었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쳐다보며 한 마디씩을 했다. 그러던 수염이 논문을 다 쓰고 몇 달이 지난 지금은 다시 검어지기 시작했다. 2년 만에 수염이 하얗게 센 것도 신기한데 고생 끝났다고 다시 검어지는 것은 더 신기한 일이다. 규진이 말처럼 회춘이라도 하나보다.
다만 한 가지, 머리를 깎으면 힘이 빠지는 삼손처럼 흰 수염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면 나도 이제 ‘백미’가 아닌 평범한 재주로 돌아갈까봐 그게 걱정이다. 안 그래도 요즘 벌여 놓은 일들이 진도가 잘 안 나가는데, 점점 사라지는 흰 색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나의 치열함 같아서 씁쓸하다.
참고로, 마씨 오형제 중 마량의 동생은 ‘마속’이라는 사람이다. 마씨 오형제는 모두 재주가 뛰어나다고 했듯이 마속도 재주가 뛰어났다. 그런데 유비는 마속이 재주보다 말이 앞선다며 중히 쓰지 않았고 제갈량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의 재주를 아껴 신임하고 대우하였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전쟁을 일으킬 때 마속도 따라갔다. ‘가정’이라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일에 마속이 자원하자 평지에서 길목을 막으라는 작전을 명령한다. 마속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위나라의 장합에게 큰 패배를 당하고 중요한 길목을 빼앗긴다.
제갈량은 명령을 위반한 마속을 군법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을 아꼈기에 눈물을 흩뿌렸다.
마속의 재주가 아까워 살려주자는 장완에게 제갈량은, 자신이 먼저 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법을 따르겠느냐고 말했다. 장완이 그러면 왜 우냐고 묻자 제갈량은, 유비의 말을 듣지 않고 중요한 길목에 마속을 보낸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운다고 하였다. 이를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