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과 3학년 때도 국어 수업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12반 중에 맨 뒷반 두 반만 수업하시는데도 함께 수업하게 돼서 놀랐지만, 내심 좋았고, 안심(?) 되었어요. 맨 처음엔 책 표지부터 공부하고 게다가 뒷표지까지 공부하는 게 이해 안 되기도 했지만, 한 시간 한 시간 국어 수업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점 선생님 수업 방식이 마음에 들었었거든요.
가끔은 아리송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학생 B-
위는 중학교에 발령 받고 첫 학교를 떠날 무렵, 즉 15년쯤 전의 국어 수업에 대한 학생B의 평가이다. 요즘 교과서를 새로 만드느라 예전 자료를 정리 중인데, 위 소감문에서 "책 표지부터 공부하고 게다가 뒷표지까지 공부하는" 부분이 새롭게 다가온다.
대학교 4학년 동안 이대규 선생님께 지겹도록 들은 말은 "교과서는 쓰레기야."였다. 교사가 교육과정만 볼 줄 알면 교과서는 필요없다는 뜻이다. 교육과정에 맞게 자료를 찾고 학습 활동을 구성하여 수업하면 된다. 이는 '교사 교육과정'과 '교과서 자유발행제'의 출발이 된다.
나는 이대규 선생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항상 교과서와 거리를 두었다. 첫 발령 학교에서는 "교과서는 쓰레깁니다."라고 중학생들에게도 명시적으로 말하고 다녔는데, 아직 말로만 배우고 체화가 덜 되었다는 증거였다. 다음 학교부터는 굳이 그렇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교과서는 하나의 자료로서만 사용했다.
그런데, 교과서와 거리를 둔다는 것이 교과서를 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학생B의 이야기에도 나와 있지만, 교과서의 표지부터 뒷표지까지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검토한다는 뜻이다. 교과서에 어떤 중요한 설명이 적혀 있더라도 그것을 '집필진'의 의견일 뿐, 절대적인 진리로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뒷표지라는 것은 아마 진짜 뒷표지가 아니라 맨 뒤의 '서지' 정보일 것이다. 거기에 집필진, 연구진, 검토진, 삽화, 인쇄처, 판쇄 정보가 있는데, 교과서도 초판과 2판, 3판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교과서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고, 틀린 내용은 다음 판을 찍을 때 고칠 수 있으니, 여러분도 교과서를 보다가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집필진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지적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2007년인가 문법 단원 공개 수업할 때, 컴퓨터실에서 프로그램학습법(이라고 해봤자 개인별 퀴즈 형식)으로 문법 수업을 하고 궁금한 건 집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수업을 마무리하였다.. 교과서에 집필자 이메일은 안 나와 있지만, 각 대학교 홈페이지에는 집필에 참여한 교수들의 전자 우편 주소가 적혀 있어서 이메일 주소를 찾는 것은 쉬웠다.
교과서와 거리를 둔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비문학 작품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는 뜻이다. '내용'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생각 자체를 비판할 필요가 없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은 누구나 다르기 때문이다. 대신 문학 작품은 "관습적 해석"을 경계하며 자습서와 지도서에서 제시한 주제를 부정하고 스스로 주제를 찾도록 한다. 비문학 작품의 주로 '형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면 내용의 통일성은 대체로 문제가 없다. 대신 개요의 일관성이나 설명 방식의 엄밀성이 부족한 경우가 있다.
사실 문학 작품과 비문학 작품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읽으려면 대충 읽어서는 안 된다. 그냥 읽고 내용 확인 퀴즈 몇 개 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교과서와 거리를 둔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교과서의 모든 글들을 꼼꼼히 읽는다. 교과서의 머리말을 비문학 제재로 삼고, 교과서의 표지와 여백과 디자인을 매체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문학 제재를 문법 단원의 예시 문장으로 삼는다. 운율 단원에 나온 시는 나중에 화자 단원에서 또 다룬다. 요약하고 예측하며 읽은 1학년 교과서의 비문학 작품은 2학년 설명 방식, 3학년 논증 방식 단원에서 또 다룬다. 이것이 교과서를 앞표지부터 뒷표지까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이다. 씹고 뜯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즐기는 것도 포함되는 이유는 모든 작품을 비판만 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에 멋진 작품이 실려 있다면 아낌없는 감동과 전율을 학생들에게 선사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교과서를 보지 않는다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오해를 할 수 있음을 깨달은 일이 최근에 있었다. 엄청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 국어 선생님들과 비문학 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교과서의 글들은 학생들에게 재미도 없고 수준도 안 맞다. 어떻게 흥미롭고 수준에 맞는 글을 골라 수업을 하는가?"를 물었는데, 나는 속시원한 답을 줄 수가 없었다. 나는 흥미롭고 수준에 맞는 글을 아이들에게 제시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습용이었고, 본 게임은 교과서의 제재 글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선생님들은 '아예 교과서 제재를 배제하고 참신한 글을 발굴하여' 학생들과 비문학 수업을 해 왔는데, 글을 찾기도 어렵고, 애써 찾아도 아이들은 여전히 어려워하거나 흥미 없어 한다는 것이 고민이었다. 교과서의 제재를 배제하는 것이 '교과서를 보지 않는다'의 의미라면, 내가 말하는 '교과서를 보지 않는다'와는 다른 의미이다.
중학생 수준에 맞고 흥미로운 글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비된다. 교과서의 비문학 제재를 120% 활용하는 방법을 쓴다면, 교과서밖의 제재를 찾는 데에 소비되는 시간을 아껴서, 휴식을 취하거나 학습 활동을 구상하는 데에 쓸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의 비문학 제재가 흥미가 있고 없고는 내 생각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르치는 중학생들이 나중에 커서 마주치게 될 현실의 글들이 본인의 흥미에 맞고 수준에 맞는 글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학생들이 '전혀 흥미도 없고 수준에 맞지도 않는 글'이라도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분석하고, 비판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기를 바란다.
내가 보지 않는 것은 '재제'가 아니라 학습활동이다. 학습활동에 대해서 말하자면, 학기 중에 수업을 할 때에는 학습활동은 선택적으로 몇 개만 하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가르친다. 하지만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방학 전까지 시간이 남으면, 교과서 1쪽으로 돌아가서 비어 있는 학습활동을 모두 채우면서 남은 학기를 다 쓴다. "여러분이 이번 학기에 국어를 잘 배웠으니까 교과서에 있는 문제들을 모두 풀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총복습을 교과서로 하는 것이다. 학기말에 진도를 다 나가고 기말고사를 쳤으니까 이제 뭘 할까? 고민하는 교사들이 있는데, 학생들에게 교과서의 학습 활동을 풀 수 없다면 진도를 다 나간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튼 멋진 글들이 잔뜩 실려 있으면 학습활동은 전국의 교사들이 자기 취향대로 마음껏 꾸릴 수 있는 자료집 형태의 교과서를 만들고 싶지만, 그랬다간 검정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겠지. 문법도 이상한 탐구 흉내만 낸 그런 활동보다 깔끔하게 설명된 이론서 형식으로 단원을 만들고 싶지만, 안 될 것이다. 아마 현장에서는 좋아할 교사들이 더 많으리라 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