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에서 목표와 목적은 구별된다. 목표는 도착점 행동, 의도된 학습성과이며, 이 과정이 끝났을 때 학습자가 변해 있을 모습이다. 목적은 학습자가 "왜 그런 모양으로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된다.
문법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학습자가 왜 문법을 잘 알고 잘하고 좋아해야 되는가? 와 같은 질문이다. 문법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이거 왜 배워요?"라고 묻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교육의 목표에 대한 답은 "교육과정"이라는 교직 과목에서 다룬다. 교육의 목적에 대한 답은 "교육철학"이라는 교직 과목에서 다룬다.
"항존주의", "본질주의"에서는 문법 지식 그 자체가 중요하니까 배워야 돼.
"진보주의"에서는 문법을 다루는 그 자체가 학생의 삶이 되어야 해.
"비판주의"에서는 문법을 잘 다뤄서 현실에 눈을 떠야 해.
"분석철학"에서는 "문법을 잘 안다는 게 뭐지?", "문법을 잘한다는 건 뭘 말하는가?" 이딴 질문을 한다.
"후기구조주의"에서는 문법 왜 배우냐고? 몰라. 문학이 더 중요해? 그것도 몰라. 독서는? 몰라. 뭐 이런 식이다(과장이 많다)
요즘 마을 교육이 유행한다. 마을 교육의 목표는 '마을과 융합하는 교육'이다. 마을 교육의 목적은? 이에 대한 답은 "생태주의"라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학교의 주인은 교사도, 학생도, 정부도 아닌 "마을"이라는 인식이다.
프레이리의 "비판이론"에 근거한 교육을 추구하는 나로써는 "생태주의"에 기반한 마을 교육을 쉽게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따라하기도 어렵고 어설프게 적용하기도 어렵고, 근본적으로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시골동네는 면 단위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우리 "마을"에는 초등학교가 없다. 누구를 위한 마을인가? 대도시에는 버스를 타고 7~8 정거장 지나 중학교를 다닌다. 학교에서 "마을"을 배운다면 "누구 마을"인가? 이제 동네에는 "동사무소"도 없다. "동"은 없고 거리, 로, 길만 있다. 정부의 정책으로 마을은 파괴되고 전국민이 길에 나앉았는데 어느 마을을 살린다는 말인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한 학기 한 권 읽기' 같은 것도 어떻게 보면 그레이트북스를 주장한 "항존주의"의 비판적 계승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항존주의자도 아니다.
교육을 할 때, 교육철학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목표와 목적을 구분하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함정에 빠진다. 질문은 '목표'를 묻고 있고, 학생은 '목적'을 대답했다. '까닭'의 층위가 얼마나 더 본질적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이다. 문법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불평한다. "명사, 대명사, 이딴 거 왜 배워요?" 교사가 대답한다. "품사 분류를 할 수 있게 되려고." 이것은 '목표'에 대한 대답이다. 학생들이 그걸로 만족할리 없다. 학생들이 묻는 '왜'는 그 '품사 분류'를 왜 배우냐는 '목적'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