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 중국에서 공무원이 되려면 예악/활쏘기/글쓰기 등 6가지(예, 악, 사, 어, 서, 수)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예약은 6덕, 활은 6율, 글은 6서로 나누어 6*6이 되게 분절적으로 교육했다.
하지만 배울 때는 절차에 맞춰 절도 있게 배워서 활을 쏘지만
전쟁터에 나가서는 법도에 맞춰 활을 쏠 수 없다.
각 기능을 배울 때는 어쩔 수 없이 분절적으로 배우지만 그 기능을 사용할 때는 융합적으로 사용하여 '신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창발, 떠오름 현상이라는 말이 쓰인다. 무기물질이 모여서 '유기물질' 즉, '생명'이 되는 것. 그리고 생명이 진화를 거듭하여 '영혼'이 되는 것.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
교육에서 행동주의가 비판받는 것은 분절적인 교육, 단계적인 교육으로 도달한 부분의 합이 전체와 꼭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창발할 수 없는 상태.
구성주의 교육은 분절적인 교육을 하지 않는다. 교육으로 따지면 장자에 나오는 수레바퀴 깎는 노인과 같은 것이다. 자신은 수레를 잘 깎는데, 자식에게도 그 기술을 알려줄 수가 없다. 그저 "잘 보고 따라해라." 해 놓고, 따라하다보면 저절로 깨닫게 되는 교육이다.
예전에 서예가이신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붓글씨를 가르칠 때 "야야, 붓 대는 거 잘 봐라." 이 한 마디였다고 하는데, 이 교육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구성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스스로 깨치기만 하면 스승보다 더 뛰어난 성취를 할 수 있게 된다.
행동주의 교육은 평균적인 표준인간을 만들기에 적합하다. 구성주의 교육은 구성 실패 또는 최고 수준의 교육, 극단적으로 말해서 양극화 교육에 적합하다.
고대의 중국처럼 분절적으로 가르치되 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육을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어는 본질적으로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큰 존재이다. '언어의 창조성'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문법은 언어를 분절적으로 세분화해서 가르치는 교육의 영역이다. 그 분절적인 교육을 끝에 융합된 창발,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를 떠오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