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분류]결혼 선언문
  • 관리자
  • 작성일 : 2018-06-17 20:34:38
    도올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옮겨 옴.

    그녀의 동의를 얻어 한없이 기쁜 나는, 나의 생애에서 알았던 유일한 여인과 결혼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것, 즉 그 상태로 그녀와 들어간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기존의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결혼 관계의 모든 성격을, 그녀와 나는 우리의 양심을 걸고 완벽하게 거부한다. 기존의 법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계약된 쌍방 중 일방에게 타방의 행동의 자유와 재산과 인격을 그녀의 소망과 의지에 무관하게 제어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가증스러운 권리를 법적으로 제거시킬 수 있는 수단을 현재로서는 가지고 있질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결혼법에 대한 정식적 항의를 문서화시켜 남겨둘 의무를 느낀다. 이것은 이러한 권리가 부여되는 한에 있어서는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도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신성한 맹세이다. 테일러 부인과 나 사이에서 성립하는 결혼의 계제에, 나는 다음의 선언이 나의 의지와 의도에 적합하며 우리 둘 사이의 계약의 조건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과 그녀에게 속하고 앞으로 속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의 처분의 자유와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나와 동등하게 지니며 결혼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과도 동일한 모든 개체로서의 권리를 지닌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결혼이라는 사건의 덕택으로 얻어진다고 생각되는 모든 권리의 허울을 완전히 부정하고 포기한다.

    1851. 3. 6.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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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적 항의를 문서화시켜 남겨둘 의무' 이것이 바로 지식인의 의무가 아닐까.

    링크: 
    https://bodhian.wordpress.com/2012/12/26/j-s-밀의-결혼서약서/
    밀은 25살에 23살의 유부녀였던 테일러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남편이 죽자 테일러와 결혼한다. 그것은 그녀를 알게된 지 21년의 세월이 지난 후 였으며, 그 중간에 남편의 용인하에 동거까지 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명망가 밀에게 쏟아진 영국사회의 비난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영국은 피임, 즉 인구를 증가시키지 않는 섹스가 도덕적인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거나, 혹은 남자의 재산권에 여성이 얼마만큼 포함되느냐? 의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던 상황이었으니 밀의 이러한 태도가 당시 영국에서는 얼마나 경천동지할 선언인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밀은 당시에 벌써 피임을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인구론에 입각한 경제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던 이성주의자였고 남녀의 차이가 태생적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후천적 교육의 차이라고 주장할만큼 파격적인 평등주의자였다. 게다가 이 혼인서약서는 무제한의 이혼을 용인하는 내용이라고 간주되어 졸지에 밀은 사랑의 감정과 섹스를 분리시킨 짐승이 되고, 결혼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반도덕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편견과 비난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모양이다. 벌써 150년 전의 결혼서약이지만, 지금도 이런 결혼서약을 감내할 수 있는 남자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이런 결혼서약을 감내할 수 있는 남자도 드물지만, 이 서약의 파격성에 촉각을 세우고 이러한 파격이 지니는 위험성을 감수할 수 있는 여성도 사실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도 사회전체의 비난과 편견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상대방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드물다. 이 서약서가 1851년이었으니, 조선으로 치자면 갑오경장이 있은 지 7년 후가 된다. 당시에 조선사회의 인식과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이 서약서를 읽어본다면, 왜 존 스튜어트 밀이 서양에서도 이성의 성자(Saint of reason)이라고 불리우는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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