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짓기]읽기다
  • 관리자
  • 작성일 : 2020-08-30 15:36:46

     학교에 외국에서 온 아이가 있다. 중1 때 한국 와서 우리 학교로 처음 입학하여 벌써 3년째이다. 그 아이가 2학년 때 처음 국어 수업을 맡았다.

      내 수업은 45분 동안 아이들이 출석번호 1번부터 25번까지 최소 1번 이상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누가 발표하면 "1번 학생,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어본다. 1번 학생이 맞다고 하면 "저 아이가 뭐라고 말했나?"라고 되묻는다. 1번 학생이 아니라고 하면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되묻는다. 1번 학생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면 "11번 학생, 둘 중 누구 말이 맞는 것 같나?"라고 11번 학생에게 질문을 돌린다. 이런식으로 적게는 1바퀴 반, 많게는 몇 바퀴씩 돌면 "네, 아니요."이상의 자기 생각을 매 수업마다 한 번 이상씩 말하게 된다. 대중앞에서 말하기와 남의 말을 판단하며 듣기를 매 수업시간마다 훈련하는 셈이다. 생각도 안 해 보고 "몰라요." 하면 "왜 모르는 것 같나? 저 아이 말의 어디서 어디까지 모르겠지?"하고 "안 들렸어요." 하면 "안 들리면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해라." 하며 지목받은 아이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경우 길게는 20분 정도 기다려준다.

      외국에서 온 아이 이름은 최이리나이다. 어째서인지 학교에서는 최이라라고 부른다. 이리나에게는 2학년 1학기가 고통의 시간이었다. 자기 번호가 불리면 입을 닫고 눈을 내리깔고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 20분 정도 시간을 쓰면 나도 도저히 답이 안 나올 것 같아서 다음 차례로 넘기긴 하는데, 수업 시간을 낭비했으므로 쉬는 시간에 수업을 10분간 더 한다. 아이들의 눈총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2학년 1학기에는 '발표듣기' 수업도 있었다. 화면상의 발표를 '듣기'만 하는 걸로는 약하다고 생각하여 학생들이 '개인 발표'를 하되, 발표 능력은 채점하지 않고 그 발표를 '듣는' 능력만 수행평가로 잡았다. 크게는 '요약하기'와 '질문하기'로 이루어진다. 이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리나의 발표 차례가 되었다. 발표문 만들기는 수업중에 컴퓨터실에서 다같이 자료조사를 해서 나름대로 발표문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교탁까지 나가서는 발표문을 한참 쳐다보더니 뒤돌아서서 울기 시작했다. 내가 가서 물어보았다. "그냥 읽기만 해도 된다. 발표 잘하는 수업이 아니다. 뭐가 제일 부담스럽니?" 했더니 1학년 때 자기가 친구들 앞에서 뭐라고 말했는데 아이들이 비웃고 놀렸다며 그때 크게 상처 받았고, 오늘 또 상처받을까봐 무섭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이리나는 작전을 바꾸었다. 수업 중에 자기가 말할 차례가 되면 입을 다무는 대신 "몰라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정도면 큰 발전이라 생각하고 더 묻지 않고 다음 번호 학생을 지목하였다.
      어느날 쉬는 시간에 이리나는 소설책을 보고 있었다. 키릴문자로 된 소설책이었다. 알아보니 그 아이는 초등학교까지 러시아어가 공용어인 학교를 다녀서 러시아어에 능숙하였다. 그리고 주말마다 동네에서 자원봉사자에게 한국어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2학기가 되었다. 2학기에는 창작 수업을 했다. 일반 학생들은 시, 소설, 수필을 한 편씩 썼다. 한 달 정도 이어진 창작 수업 내내 이리나에게 "러시아어로 써도 된다. 한국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러시아어로 써 오너라."라고 설득한 끝에 공책 한 바닥짜리 수필을 받았다. 러시아어로 된 글을 들고 초량 러시아 영사관에 가볼까 어쩔까 하다가 부산외대에 교수로 있는 선배에게 연락했다. 번역 내용은 "한국 힘들다. 고향 가고 싶다. 친구는 없고 적뿐이다. 러시아어 잊어버릴까봐 겁난다." 이런 조리 있는 내용이었다. 이리나의 글까지 넣어서 아이들 시와 수필 문집을 만들었다.

      1년이 끝났다. 나는 2학년에 이어 3학년에도 이리나를 맡게 되었다. 수업 방식은 지금도 변함없고, 아이들은 작년 한 해 동안 숙달되어서 수업 분위기는 3월초부터 진지하고 활기찼다. 이리나는 3학년 1학기가 되자 수업 시간에 "맞아요." "아니에요."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감동을 받았다. 뭔가 더 해줄 게 없나 찾아보는데 우연히 부산대학교에서 '러시아어 받아쓰기 대회'를 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부산대 러시아 센터에서 전체 홍보 메일을 보낸 것이다. 이리나를 꼬셔서 러시아어 받아쓰기에 데리고 나갔다. 솔직히 좀 반칙이라 생각했지만 러시아 국적도 아니니 그냥 모른척했다. 결과는 당연히 95점에 1등급.
      3학년 1학기에는 모둠별 토론 수행평가가 있었다. 이리나는 개인적으로 나를 찾아와서 "저도 해야 돼요?" "안 하면 어떻게 돼요?"하고 자꾸 걱정하였다. 내가 '입론' 담당을 맡으면 적어 온 대로 읽기만 하면 된다고 하며 돌려 보냈다. 이리나가 속한 모둠의 토론 당일. 나는 기대반 걱정반으로 "찬성측 입론해 주세요."라고 진행을 시작했다. 이리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종이를 펴서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더듬더듬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달 후 1학기 마지막 단원 '국어의 문법 요소'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리나를 개인적으로 불러서 '시간, 부정, 시간, 피동, 사동'의 예를 하나씩 보여주고 "이거 뭔지 알겠어?" 하니까 약간 비웃는 표정으로 ‎안다고 하였다. "러시아말에도 이런 거 있지?" 하니까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업시간. 거꾸로 수업을 준비했기에 아이들은 유튜브 영상으로 미리 보고 온 '시간 표현 핵심 내용'을 기억을 떠올리며 ‎모둠별로 정리하였다. 모둠별 정리 후 학급 전체와 내용을 비교하였다. 아이들의 활동이 끝날 무렵에 내가 "문법 요소라는 건 한국어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외국말에도 일본어든 러시아어든 영어든 당연히 있습니다. 먹는다가 먹었다 되듯이 eat가 과거 되면 ate인 것과 똑같습니다." 하니까 아이들이 수군수군하였다. 물어보니 이 반에 일본어 잘하는 애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본어한다는 애한테 "일본어에 과거형 있지? 먹다로 해 봐." 그 애는 남학생이었는데 망설임없이 "타베다. 타베다타."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이 "중국어 중국어" 하면서 한 여학생을 가리켰다. 여학생은 "전 잘 못해요." 하면서도 중국어로 뭐라뭐라 하였다. 나는 "러시아도 그런 거 있지? '먹는다' 해 봐 줄 수 있겟니?"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이리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러시아 말을 하였다. 나도 잘 안들렸지만 "먹었다는 그럼 어떻게 해?" 하니까 또 뭐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웃기도 하고 신기하다고 소근거렸지만 아무도 비웃지는 않았다.
      문법 요소 다섯 가지를 모두 배우고 1차시 내내 총정리 문제 풀이를 하는 시간을 주었다. 우선 학생 중에서 심사위원 몇 명을 뽑아 교실 뒤에 배치하고, 문법 문제 200개 정도를 한 문제씩 잘라서 교실 앞에 두면 아이들이 아무 문제가 하나씩 집어 가서 풀고 교실 뒤의 심사위원에게 검사받는 방식이었다. 문제 푸는 아이들은 4명이 1모둠인데, 각 모둠원의 문제 푼 개수 합계가 가장 많은 모둠에게 빵을 주었다. 심사위원들에게도 수고했다고 빵을 주었다. 이리나는 몇 문제를 풀어서 굳이 나에게 검사 받았다. 심사위원 아이들과는 안 친해서 대화를 하지 않는 상태였다. 이리나가 푼 문제는 높임법과 부정문에 대한 문제였는데 모두 다 정답이었다. 이리나가 다시 한 번 약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너무 쉬워요."라고 말하였다. 기말고사를 쳤다. 지금까지 모든 서술형 답지를 백지로 냈던 이리나는 이번에 맞는 답을 절반 가까이 썼다.
      오늘 국어 수업 마치고 다른 아이들이 교실로 가는 중에 이리나가 갑자기 칠판 앞으로 나왔다. 국어 교과실 앞에는 멘토링 학생용 교재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다. "읽기다는 뭐예요?"     
     
      나는 질문의 의도를 살폈다. '읽기의 말 뜻을 모르는 건가? 이 교재가 왜 여기 있냐는 뜻일까? 아니면 이 교재를 달라는 뜻인가?' 몇 초의 침묵이 흐른 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번에 배운 단원에는 '사동', '피동'도 포함된다. 사동, 피동에는 '-이히리기-' 같은 접사가 사용된다. ‘웃기다’, ‘뺏기다’처럼, 이리나는 '읽다'에 '-기-'를 넣어 '읽기다'가 되면 이것이 사동인지 피동인지를 물어본 것이었다. 아이들이 발음이 이상하다고 놀려요, 하면서 교탁 앞에서 울던 아이가 이렇게 한국어를 분석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아이가 됐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감동에 젖었다.
      이제 곧 방학이다. 3학년 2학기에는 더욱 더 국어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서 이리나가 외국에서 온 한국어를 잘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어 능력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 졸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을 맡은 의무교육기관인 '중학교' 교사들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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