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크툼은, 스투디움을 깨뜨리러 온다. 이번에는 내가 그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장면으로부터 화살처럼 나와 나를 관통한다. 뾰족한 도구에 의한 이러한 상처, 찔린 자국, 흔적 (…) 푼크툼은 또한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이며, 또한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푼크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따르는 그 우연이다.
푼크툼은 하나의 세부 요소, 다시 말해 부분적인 대상이다”. 대개 푼크툼은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그것은 코엔 베싱의 사진에서는 아이의 시체를 보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침대보이며, 제임스 반 데르 지의 사진에서는 흑인 여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이며, 루이스 하인의 사진에서는 정박아 소년의 당통식 칼라이며, 나다르의 사진에서는 흑인 견습 선원의 팔짱 낀 팔이며, G. W. 윌슨의 사진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탄 말의 고삐를 쥔 사내다.
푼크툼이 하찮은 것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 의도하지 않은 디테일이 내 안에 무언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내 안에서 작은 전복, 즉 어떤 공의 지나감을 야기”시켜야 한다. 바르트는 이를 선(禪)에서 말하는 ‘사토리’(悟り, 순간적인 깨달음)에 비유한다. 나아가 푼크툼은 하나의 보충, “시야 밖의 미묘한 영역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가령 성기를 노출시킨 포르노 사진과 달리 성기를 노출시키지 않고도 보는 이를 프레임 밖으로 이끄는 에로틱 사진처럼, 푼크툼도 관객을 프레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 어느날 학생들과 이 시를 다루는데, 이 첫 구절이 가슴에 푹 와 박히는 것입니다. ‘익어가는’이라는 현재형. 현재형은 절대적 진리를 표현합니다. “지구는 태양을 돈다.” 절대 진리는 과거형으로도 미래형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육사에게 광복은 어쩌면 절대적 진리가 아니었을까요?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칠월이 되면 청포도가 익는. 물론, 그 해 그해 기후나 토양의 변화에 따라 청포도가 유월에 익을 수도 있고 팔월에도 안 익을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칠월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일단 그때가 되기만 하면 청포도는 익는다는 변함없는 사실. 광복이 일찎 올 수도 있고 천천히 올 수도 있지만 광복이 올 거라는 것 자체는 변함없는 절대적 진리라는 거지요. 설사 올해에 내해, 수해, 염해를 다 입어 청포도가 한 알도 안 익는다 하더라도, “내고장 칠월”이 “청포도가 익는 시절”이라는 그 사실은 훼손시키지 못한다는 신념. 이육사의 의도와는 관계 없을지라도 시를 읽는 ‘나’라는 독자에게는 전율을 일으키는 첫 구절이었습니다.(-이었습니다, 가 과거형인 이유는, ‘전율을 일으키는 첫 구절입니다.’와는 달리, 또 어느날은 몇 연 몇 행에 ‘필이 꽂힐지’ 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